‘황금의 입’이라는 의미의 크리소스톰(Chrysostom)을 별명으로 가진 존(347-407)은 흔히 ‘존 크리소스톰’이라 불린다. 그는 교회의 박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344-354년 사이에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훌륭한 모친 안투사에게서 신앙 훈련을 받은 후, 그는 정치가이며 법률가인 리바니우스에게서 법과 수사학을 배웠다. 안디옥 감독 멜레티우스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다소의 디오도레에게서 신학을 3년 간 배우면서 교회에서 성구를 낭송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법을 포기했다.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모친인 안투사가 죽은 후 존 크리소스톰은 복잡한 도시를 떠나 남부 안디옥에 있는 산악지대로 들어가 수도원적 삶을 6년간 살았다고 한다.
그는 381년 안디옥의 부제로, 386년 사제로서 수임 받았다. 12년 동안 안디옥 강단에서 존은 감동적이고 웅변적인 설교를 행했다. 그리하여 그는 ‘크리소스톰'(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받게 된 것이다. 397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넥타리우스가 죽자, 존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련 없이 그곳의 감독으로 선출된 것을 통보받고 멀리 도주까지 했으나 붙잡혀 왔다. 웅변적인 설교로 인해 존은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목회 영역을 고트족에게까지 확대시켰다. 또 성경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할 뿐만 아니라 통역자를 대동해서라도 그들에게 설교하는 열정을 나타내었다. 다뉴브 강에 살고 있는 고트족과 스킨디안족에게 선교사들을 보냈으며, 심지어 추방을 당한 가운데서도 선교의 일에 깊은 관심을 잊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거짓되고 사악한 삶들을 개혁하는 가운데 존은 많은 적들을 만들고 말았다. 더욱이 성전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과 병원을 지었다. 스스로는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았다. 남편 아르카디우스보다 인기를 독차지하는 존을 시기한 그녀는 그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더욱이 존은 황후 유독시아의 사치스러운 궁궐생활만 아니라 사치스러운 자들의 삶을 존은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런 가운데 401년 1월 에베소 성직자들과 근교 감독들의 요청을 받아 방문한 존은 지역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를 일삼는 6명의 감독들을 파직하였다. 그리고 존이 출타하는 동안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을 신임하여 맡긴 카발라 감독 세베리안은 황후와 함께 존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 또 403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로스가 출교시킨 몇 명의 경건한 수도사들을 존이 피난처를 마련하자 원한은 더욱 가세되었다. 그리하여 모반죄라는 혐의를 받고 파직을 당한다. 150cm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존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면서 그 앞에서 세속적 부귀와 편의주의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추방당한 가운데 407년 흑해 근교에 있는 폰투스에서 외롭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407년 9월 14일 추방 생활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난 존 크리소스톰의 마지막 말은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있기를”이었다. 후에 그의 유골은 438년 유독시아의 아들 동로마제국의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408-450)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출처: 김은홍, 기독신문, 2005년 9월 9일 (1548호),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43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