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15:1-10
명절 풍경
추석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말에 음식을 준비하셔야 하는 분들은 한숨을 쉬시기도 하고, 친척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을 학생들은 신나기도 합니다. 아마도 뉴스에는 “민족의 대이동”을 중계한다며 헬기로 곳곳을 훑으며 보여줄 것입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서울역 대합실이나 꽉 막힌 고속도로, 산에 성묘하러 온 사람들을 화면에 담을 것입니다. 뉴스에서는 얌체 운전하는 사람들도 나올 것이고, 열 몇 시간 만에 고향에 왔다는 사람들을 인터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예전에는 통일전망대에서 차례 지내는 실향민이나 명절에도 일을 해야 하는 산업 역군들을 화면에 담을 것입니다. 이런 장면은 십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인천공항을 보여주면서 역대 최대 출국이라며 기사를 낼 것입니다. 또 고향에 못가는 사람들도 직업 때문에 못가는 것이 아니라 취직을 못해서, 학업 때문에 못 간다며 씁쓸한 소식도 전할 것입니다. 아직 명절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뉴스를 다 본 느낌이 듭니다.
서먹한 관계
그렇게 힘들어서 고향에 가고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지만 기뻐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친척끼리 서로 사이가 나쁠 것도 없는데,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이런 저런 일로 서로 기분만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군대는 언제가니? 취직은 했니? 만나는 사람은 있니? 시집장가는 언제 가니? 애는 언제 낳니? 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봐서 서먹한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하니 분위기가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게시판에다가 명절에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지 서로 팁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 질문을 잘 되받아쳐서 상대를 골탕 먹이면 속 시원한 사이다 같다며 서로 자랑하며 글을 쓰기도 합니다. 시댁과 며느리 사이에 갈등도 이때를 기점으로 폭발하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선이 분명히 있습니다. 가족들 간에도 친척들 간에도 갈등의 선이 분명히 드러나는 때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갈등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을 갈라놓은 선이 있었습니다. 바로 의로운 사람과 죄인들을 갈라놓은 선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비난했습니다. 무식한데다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지 않는 놈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저렇게 말씀을 안 지키니깐 우리나라가 이렇게 식민지가 되어버렸지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과 죄인들 사이에는 그렇게 분명한 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나뉘어져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선을 넘어서는 하셨습니다. 바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자리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같은 부류임을 확인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밥 한 번 먹자는 얘기는 밥만 먹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제하자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입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죄인들과 세리와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한 소리 들을 수 있는데 그들과 함께 먹으니 말이 이곳저곳에서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 일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남들과 다른 선택에 대해 사람들은 그 이유를 묻습니다. 예수님께도 왜 그렇게 하나며 책망이 담긴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쩌다가 하신 것이 아니라면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 해명에 따라 예수님의 인기가 떠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양의 비유와 하나는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양 백 마리가 있습니다. 아마 낮에는 풀어놓고 풀을 먹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서 다시 우리에 모으는 와중이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세어 봐도 한 마리가 빕니다. 잘못 세었나 싶어서 아마 여러 번 세었을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말 안 듣는 새끼 양이 한 마리가 안보입니다. 다 큰 양일수도 있겠지만 한 마리가 안보입니다. 아마 여기서 짐승을 키우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짐승들도 다 성격이 있습니다. 특징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양을 치는 목자는 각 양의 이름을 붙여주며 구별할 것입니다.
다른 놈들은 잘 있고 그 한 놈만 없습니다. 99%는 문제가 없고, 1%로가 문제입니다. 100%는 아니지만, 99%로가 괜찮으면 무시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숫자로는 1%로지만 목자에게는 양이 한 마리가 아닙니다. 다른 양들과 달리 말도 안 듣고 혼자 도망간 양이지만, 그 양이 다른 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양이 태어날 때부터 지켜봤습니다. 그 양이 어떤 성격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 길을 잃고 벌벌 떨고 있을지, 다쳐서 쓰러졌는지, 혹시 늑대에게 물려갔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나쁜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꾸만 떠오릅니다. 그래서 늦은 시간이지만 목자는 양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렇게 왔던 길을 돌아가고 그 근처를 살펴보니 그토록 찾았던 녀석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무리에서 떨어진 양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혼자는 살아남을 수 없으면서 무리에서 낙오한 양은 탈진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혼자 좋다고 맛있는 풀 먹으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목자는 떨고 있던 양을 찾고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을 어깨에 메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와서 동료들에게 자랑할 것입니다. 벗들에게 얘가 집을 나가서 한참을 찾았다가 겨우 찾았다며 기뻐할 것입니다. 저 집나간 양이 잘못했고, 나는 잘못이 없다고만 생각하면 양을 찾는 기쁨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한 여인이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장면에서 시작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집은 창문도 없는 흙집이었습니다. 흙으로 지은 단칸방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드라크마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더듬더듬 하고 있지만 어디 있는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 드라크마는 당시 가치로 노동자 하루 품삯 정도였습니다. 물론 물가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우리로 치면 7만원에서 10만원 정도 될 것입니다.
그 돈이 아까워서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열 드라크마를 결혼 지참금이나 패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만약에 신부를 데려올 때 신랑이 패물로 준 동전이라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물론 신랑이 미워서 신랑이 준 선물도 싸그리 버리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시집올 때 받았던 선물이라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열 개를 받았는데, 한 개가 없어지면 그 의미가 그대로겠습니까?
만약 신랑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결혼때 받은 패물을 잃어버린 분들 계십니까? 혹시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으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이 여인은 불을 켜고 바닥을 쓸어내면서 찾았을 것입니다. 어디 침대도 들쳐보고, 광주리도 엎어보고 평소에 건들지도 않던 세간들을 다 들었나 놨다 하면서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 사는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며 찾았다며 기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아마도 한 나절은 얼마나 어렵게 찾았는지 이야기하면서 보낼 것입니다. 내가 패물로 받은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드라크마를 다시 찾고 기뻐할 수 있었겠지만, 그 드라크마를 잃어버린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다시 찾는 기쁨을 누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 기쁨을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고 교제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는 자들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되는 일을 기뻐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을 99마리의 양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9개의 드라크마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이 비유를 들으면서 나는 99마리의 양으로, 또 남아있는 드라크마에 대입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떨까요? 소위 의인이란 사람들,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일까요? 그들이 율법을 준수한다고 하지만 정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요? 몇 가지 조문에는 강박적으로 반응하지만 그렇지 않은 조문에는 무시하고 지나가지는 않았을까요? 아니 조문은 열심히 지키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는 있었을까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는 경우에 율법주의에 가까운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구약에 돼지고기 먹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안 먹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준수한다고 하지만 음욕을 품었다고 손을 잘라버리거나 눈을 뽑아버린 분을 저는 본적이 없습니다. 특정 조문에는 아주 철두철미하게 지키지만 자기가 관심없는 부분에는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그 말씀의 의도와 상관없이 겉으로 지켰냐 안지켰냐 초점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는 다 지켰다고 생각하지만, 자기는 의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 외에는 사실 안지켰을 확률이 높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해도 자기 눈에 안띄는 부분에는 먼지가 쌓여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이 의인이란 사람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잃어버린 양일 뿐입니다. 여자의 손에서 사라진 한 드라크마입니다. 자기들은 다른 자들이라고,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 길 잃은 양들이었던 것입니다.
자기도 길을 잃어 헤매고 있으면서 자기가 정한 기준으로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더럽다고 할수록 자기는 깨끗해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깨끗하다고 생각할수록 다른 이들이 더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내가 말씀에 철저할수록 다른 이들은 죄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선이 있었지만 그 선은 누가 그어 놓았습니까? 그 선은 자기가 그어 놓은 선이었습니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일 뿐이었습니다. 그 선을 넘나들며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정작 선은 누가 넘었습니까? 예수님이 그 선을 넘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는 이 선이 하나님이 그어 놓은 선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그 안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가 그어 놓은 선이었습니다. 그 선 안에 있든 없든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가 그어 놓은 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는 기쁨에 주목해야 했습니다. 그 기쁨을 함께 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자기가 그어 놓은 선에 집중한 자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적용
이런 실수는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내가 정한 기준이, 내가 그린 선이 마치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절이 되면 이 선과 선이 부딪히게 됩니다. 기준과 기준이 부딪히게 됩니다. 내 생각에는 며느리가 하루 종일 있는 것이 당연한 것 같고 시누도 보고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게 맞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기준이 다릅니다. 내 딸이 친정에 왔으면 남의 딸도 친정에 가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쉬었다 가라, 좀 있으면 시누 오는데 보고 가라 이런 말하면 겉으로 조용해도 돌아가서 싸움이 납니다.
오랜만에 본 친척들 간에 서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공격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대학 다니니? 군대 언제 가니? 취직은 했니? 시집/장가는 언제 가니? 아이는 언제 낳니? 이 질문은 “왜 좋은 대학을 못 갔니? 왜 군대를 제 때 안갔니? 왜 좋은 직장에 취직을 못하니? 왜 너는 남들 다가는 시집 장가를 못가니? 너는 왜 아이를 안 낳니?“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도로 물은 게 아니어도 그렇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보게 되었으니 같이 대화할 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내 기준에 비추어서 상대를 모자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위축한 상태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분위기가 험악해 질 수 있습니다.
좋은 대학 간다고 내가 등록금을 대주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안했다고 결혼 자금을 대주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취직자리를 잡아 줄 것도 아니면서 내 생각에 안 맞으면, 내 기준에 안 맞으면 왜 그러냐고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명절이라고 해서 모였지만, 서로가 모르는 사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그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말 못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정을 알아주기는커녕 내 기준으로 평가하고 이런저런 조언을 하다보면 그 선이 벽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관계가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말했으면 되는데, 조금만 더 격려해주면 되는데, 수고했다고 말이라도 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해서 사이가 나빠지게 됩니다.
좋은 대학을 가고 취직도 잘하고, 시집 장가도 잘 간 사람은 흔히 엄친아라고 합니다. 엄마가 항상 비교할 때 드는 엄마 친구 아들이지요. 예, 너 누구 알지, 걔가 이번에 대기업에 취직했다더라. 이번에 결혼한다더라 할 때 그 사람, 엄친아입니다. 그런 엄친아라 할지라도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도 자기만의 기준일 뿐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교당하며 괴로울 뿐입니다.
우리도 사실은 다른 이들의 선을 넘어선 자들인 것을 기억할 때, 어쩌면 나도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내가 그린 선을 넘어 다른 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나도 내가 정한 선을 넘어 다른 잃어버린 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내 삶이 열 드라크마에서 하나가 비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될 때 나머지 한 드라크마를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상대를 대할 때 우리는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찾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입니까? 아니면 길을 잃은 한 마리입니까? 우리는 열 드라크마 다 갖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를 잃어버려 찾고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 스스로가 잃어버린 자, 부족함 자임을 인정할 때 형제를 다시 찾은 기쁨, 가족을 다시 얻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돌아오는 추석 명절에는 오랜만에 모여 싸우다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대신하여 격려하며, 위로하며 잃어버린 자들을 찾는 기쁨을 누리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