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18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눅16:1-9

흔들리는 터전
추석 연휴를 잘 보내셨습니까? 반가운 이들을 맞이하느라 많이 바쁘셨겠지만, 갑작스러운 지진에 놀라셨을 것입니다. 집이 흔들리고, 도로에 금이 갔습니다. 철로 보수를 하던 분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그동안 지진에 대해서는 안전하다고 자부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지진이 난 영남 동해안지역의 경우 핵발전소가 밀집되어 있어서 많은 분들이 걱정하셨을 것입니다.

일본에 비해 우리는 안전하다고 자부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우리 삶의 터전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을 수도 있고, 살고 있는 집이 무너질 수도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지금의 삶이, 지금의 모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결국에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끝이 오는데도 이 사실을 외면하는 사람은 강도를 만나듯이 이 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전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끝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재경청
어떤 부자의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멀리 떨어진 주인을 대신해서 그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였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의 재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관리할 재물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결산하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래도 장부가 정리되는 대로 내쫓을 것입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장부를 정리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청지기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언젠가는 이 일을 그만두게 될줄은 알았지만, 그게 지금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는 주인의 재물을 힘입어서 어렵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 무엇을 하고 먹고 살아야할지 막막했습니다. 땅파는 일처럼 막노동을 하기에는 몸이 약하고, 구걸하며 살자니 부끄러웠습니다. 장부정리가 곧 마무리 되는데 그 이후에 살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에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바로 빚진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어이 자네 빚이 얼만가? 응 반으로 다시 적고 사인해, 자네는 얼마 빌렸나? 괜찮아 다시 적게나.”
채권자들은 의아했지만 빚을 깎아주는데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얼른 사인하고 나왔습니다.

주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문이 안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청지기가 지혜롭게 처리했다며 칭찬합니다. 이 청지기를 횡령으로 구속해야 할텐데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적용도 이상합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원래 더러운 돈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데, 도둑질해서라도 친구를 사귀라는 말인가? 갸우뚱한 말씀입니다.

질문1: 주인은 왜 칭찬했는가?
첫 번째 질문입니다. 주인은 왜 이 청지기를 칭찬을 합니까? 청지기를 옥에 가두지 않고 지혜있다고 칭찬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청지기는 여러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감사해 하겠습니까? 빚 갚는다는 말은 죄를 용서한다는 말과 바꿔서 쓸 수 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사면을 받아서 석방되는 것만큼, 빚에서 해방되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이 사람의 가족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청지기를 옥에 가두면 사람들은 이 빚을 탕감해준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고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이 청지기를 감옥에 가두려고 해도 이미 장부가 바뀌어 있으니 얼마 손해보았는지 확실히 계산할 수도 없고 풀어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청지기는 은혜를 베푼 사람이 되고, 이 주인은 옹색하고 속좁은 인간이 될 것입니다. 청지기만 보면 감사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주인을 보면 저 수전노 같으니라고 속으로 욕을 할 것입니다. 주인의 평판은 바닥을 칠 것입니다. 돈은 돈 대로 잃고, 평판은 평판대로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은 역시 주인이 시켰던 일이구나 하면서 주인과 청지기를 함께 칭찬할 것입니다. 아마 주변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지주가 이렇게 자비로운 분이라며 침을 튀면서 자랑할 것입니다. 저분은 돈만 많은 분이 아니라 인품도 최고라며 소문이 날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빚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명성을 얻을 기회만 남았습니다. 그 청지기의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물론 주인이 관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이해하니 그렇게 칭찬했을 것입니다. 청지기입장에서는 이렇게 해도 주인이 받아줄거라 생각했으니 빚을 탕감해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청지기의 지혜로움도 있겠지만, 주인의 관대함입니다. 청지기의 지혜가 통할 수 있던 것도 이런 일을 덮어줄만큼 주인이 관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로워서라기보다 주인이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질문2: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무슨 뜻인가?
두 번째 질문은 이 비유의 적용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드시면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더러운 돈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데,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인가? 불의한 재물이라도 사람들을 사귀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인가? 갸우뚱하게 합니다.

물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힘있는 자들에게 바쳐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검사의 친구들이 문제가 됩니다. 기업으로 돈을 번 이들이 검사에게 돈을 주고 친해집니다. 심지어 검사의 내연녀 집까지 구해줍니다. 그리고 그 위세를 자랑하며 불법과 탈법을 일삼다가 감옥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업인들이 검사들뿐만 아니라 정관계 인사들에게 뇌물을 주며 사업상의 이익을 챙기기도 합니다. 그러다 그 사실을 밝힌 사람이 나타나면 언론이 공격하며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럴 때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역시 불의하더라도 인맥을 만들어 놓으면 산다는 말씀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들이 힘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한 재물이라고 할 때, 정의로운 돈이 따로 있고 불의한 돈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돈에는 누군가의 피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내는 회사지만, 일하다 다친 사람을 외면하고 모른척합니다. 겉으로는 사회 공헌을 하고 광고를 많이 하지만, 줘야 할 돈 안줘가며, 누군가의 피눈물을 짜내어 그 돈을 벌었습니다.

농부는 풍년이 되면 오히려 고민합니다. 저희 부모님도 농사를 짓는데, 더운날 고생해가며 심은 감자를 캐서 공판장에 넘겼는데, 몇 십 박스를 넘겼는데 정산해서 들어온 돈이 7천원이었습니다. 봄철 수고했던 그 노동의 대가를 7천원 밖에 쳐주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처리하는 사람들 품삯도 주고, 비용을 지불하는데 그 감자가 7천원밖에 안되는 것입니까?

내가 땀흘려 일해서 받은 돈이라고 해도 정확한 대가인지 알 수 없습니다. 더 받을 수도 있고 덜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 받았다면 그 이상의 돈은 불의한 돈입니다. 내가 덜 받았다면 상대방의 돈이 불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속에 완벽하게 정당한 재물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노력했지만 이것이 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남들보다 돈이 더 있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피와 땀이 묻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상 누구도 이 거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혼자 산속에서 사냥이나 수렵 채집을 하며 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죄가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일확천금을 노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로또를 사라고 하고, 엄청난 부를 쌓은 사람을 존경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가난을 각자의 책임으로만 여기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죄짓도록 만드는 시대의 흐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가진 것은 더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나눔으로 죄악된 구조 속에서 버텨야 합니다. 불의한 재물로 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게 될 때, 우리는 닥치게 될 결산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그러했듯이 우리 삶의 결산이 다가오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 청지기이지 않습니까?

집사(청지기)의 직분
이 청지기 직분은 바로 집사의 직분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집에서 일맡아 하는 사람을 집사라고 하는데, 왜 교회에서는 서로를 집사님이라고 부릅니까? 교회 살림을 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집사라고 하지만, 주님의 청지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손에 재물이 있지만 주님을 대신해서 관리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관대한 주인의 뜻을 읽고 빚을 탕감해준 청지기처럼, 주님의 자비로움을 기억하며 서로 나눌 줄 아는 것이 바로 집사의 본분인 것입니다. 빚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빚 안지고 살도록 돕는다면 이것도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돕는 손길이 될 때, 주님의 관대하심을 따라 나누어 주게 될 때 우리는 마지막 날의 결산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람들이 돈으로 불안을 해소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비로움으로 관대함으로 영생을 준비하기보다 인색함으로 노후를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웃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악착같이 모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개 같이 모은돈, 악착 같이 모은 돈 죽을 때까지 품에 안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돈은 한 푼도 가져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비로운 우리의 주인께서, 관대한 이 땅의 주인께서 그런 돈을 용납하시겠습니까? 다 놓고 가라고 하면 바로 내려 놓아야 합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의 피눈물이 묻은 돈으로 헌금을 하고 직분을 사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돈은 헌금으로 받지 않으십니다. 그 돈 때문에 피눈물 흘린 사람이 있는데, 억울한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돈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말씀에는 (신23: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기 말씀에는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는 자를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말3:5)

이웃의 피눈물로 얻은 돈은 성전을 더럽히는 돈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돈입니다. 이 돈으로 직분을 사고, 이 돈으로 명예를 사고, 이 돈으로 영생까지 보장받으려고 하는 자들을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주인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자들이요, 주인의 뜻을 거스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25:40) 다른 이들에게 피눈물 흘리게 하며 재물을 쌓는 것은 주님의 눈에 눈물나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각박한 세상에서 나와 내 가족만 돌보고 살다보니 다른 이들의 눈물을 흘리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남의 가슴에 대못 박으면서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의 촉구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 결산을 앞둔 이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마치 청지기가 장부를 아직 반납하기 직전의 시간처럼, 우리 또한 우리 삶을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입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불의한 청지기로 살았고, 제대로 살지 못했다 할지라도, 관대한 주인의 성품을 믿고 나아간다면 살아날 기회가 주어집니다.

주기도문에도 주님께 죄 용서를 구할 때 조건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빚진 것을 면제해 줄 때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놓고 간구할 때, 우리가 용서한 것이, 우리가 빚을 사해 준 것이 전제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치 불의한 청지기가 관대한 주인께, 주인님 제가 사람들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저도 탕감해 주세요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삭개오와 주기도문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도 그런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에게 오셨을 때 이웃에게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민족의 반역자요, 중간에서 수탈하던 죄인 삭개오, 공식적인 죄인이던 그가 돌이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갚은 삭개오는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리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이 순간은 관대한 주인이 허락한 잠깐의 유예기간입니다. 그러나 이 유예기간을 생각지 않고 손을 놓아버린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청지가 관대한 주인을 믿어 기회를 얻은 것처럼, 불의한 재물로 이웃의 눈물을 닦아줄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삶을 돌이켜 관대하신 주님께 의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우리가 주님께 죄 용서를 구하며 우리가 탕감해준 이들의 이름을 아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