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와 엎드리어

본문: 눅17:11-19

#1 개그프로그램 감사합니다
몇 년 전입니다. 개그 프로그램 중에 [감사합니다]란 코너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감사합니다~”로 시작되는 멘트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이 코너는 달리 일상적인 일을 ‘감사한 일’로 기발하게 해석을 하며 재미를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애인 몰래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데, 맞은편에 애인이 다가옵니다. 이제 큰 일 났습니다. 들통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애인도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며 옵니다. 그리고 나면 개그맨들이 “감사합니다”를 외칩니다. 이런 식입니다. 개그 프로그램이었지만 일상에서 감사를 찾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구에게 감사한 걸까요? 개그 프로그램에서 감사합니다는 딱히 누구한테 감사한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침 나몰래 딴 남자와 함께 나온 여자친구에게 감사한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아닐까요?

#2 간증의 경우
예전에 믿지 않는 친구에게 왜 예수를 믿는지 나눈적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였지만, 정작 이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삶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제가 감사했던 일들을 나누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도움을 받았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제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일들은 내가 볼 때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다”

저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일이 그 친구가 볼 때는 우연히 일어난 일로 보였습니다. 같은 사건이지만, 저에게는 신앙을 갖게 되는 계기였지만, 그 친구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 제기
오늘 본문은 감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의 목적이 다 다릅니다. 어떤 기사에서는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했고, 어떤 기사는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실 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 나병환자 열 명이 멀리 서서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은 병을 고치고 싶었지만, 감히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부정한 자들이기에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버림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들과 가까이 했다가는 병을 옮길 수 있기에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떨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멀리서 그들을 보고 피해서 다녔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왔다가는 예수님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돌을 맞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멀리서 소리쳐서 고쳐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병환자의 판단은 제사장들이 했기 때문입니다. 나병은 육체적인 병을 넘어서 하나님의 저주로 여겼기 때문에, 나병의 발병과 회복 여부를 제사장이 최종적으로 판단했습니다. 그 나병환자들은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뛰어가기만 했을까요? 아마 손과 발이 나은 것을 보고 배도 까보면서 환호성을 지르면서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가족들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자식과 배우자를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얼른 제사장에게서 나았다는 판정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다가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죽은 자처럼 살아왔던 만큼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전력으로 제사장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있냐고 물어보십니다. 나머지는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보다 율법도 잘 알고 하나님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병이 하나님께 받은 저주라면, 그런데 나병을 고치는 것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하나님께 내린 저주를 풀어주는 것,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을 뜻합니다. 치유의 의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없었을까요? 감사한 마음보다도 그들은 당장 자기 몸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왔다가 가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나병을 고치는 기적을 경험했지만, 구원을 받는 더 큰 기적은 코 앞에서 놓쳐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하는 이 사마리아인을 보시고, 그에게 네 믿음이 구원하였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것이 바로 믿음의 증거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첫 번째로 감사는 신앙의 지표입니다. 물의 등급을 정할 때는 지표종을 보고 파악을 합니다. 열목어나 산천어가 있으면 1급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라미가 살면 2급수입니다. 그런데 물고기가 없다? 이것은 죽은 물입니다. 못 마실 물이라는 소립니다. 감사가 없다? 이것은 우리 신앙이 병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감사’라는 주제는 좋은 습관, 좋은 태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감사로 표현합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어도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신앙의 눈으로 새롭게 이해하고 감사의 제목으로 바꾸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어떤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감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삶에 감사가 없다면, 우리 신앙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만으로도 평생 감사하며 살아갈 우린데, 감사가 매말랐다면 이는 큰일인 것입니다. 일상에서 주시는 은혜를 발견하지도 못하는 것도 영혼의 질병이지만, 구원의 감사가 사라진 것도 큰 병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나병환자가 병을 나은 것과 같은 기적적인 일, 대단한 일에만 어울릴까요? 우리 삶에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일상에서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매일 똑 같은 일상이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두 번째로 감사는 당연하게 여기던 일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나병환자들에게는 일상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전에 그들이 평범하게 살던 날들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았을 것입니다.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농담을 하고, 일하러 가던 날은 너무나도 평범한 하루였지만 나병환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어제와 오늘이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때가 되면 밥이 나오고, 자고 나면 또 하루가 시작되지만, 그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까?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부모가 일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자녀를 먹이기 위해 요리를 했습니다. 깨끗한 옷을 입도록 빨래를 해야 합니다. 가정이 일상이 유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수고와 섬김으로 이런 일상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아이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부모의 수고로 그 일상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저절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것은 원래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그 은혜로운 돌보심 덕분에 우리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시고 내버려두고 떠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모든 순간에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분입니다.

세 번째는 감사는 즉시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없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나중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도 이들은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 지금은 감사하다고 못했으니 나중에 예수 선생님을 만나면 감사를 표해야지 이렇게 생각했을것입니다. 아니 다음에 만나면 소라도 잡아서 대접해야지 다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감사할 기회를 사라지게 됩니다.

감사를 표현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일로 우리 마음은 잊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현할 대상이 사라지거나 그 상황이 바뀌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항상 계시지만, 사람을 통해 일하시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면 그 즉시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수록 이 부담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점점 커져서 뻥터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라져 버립니다. 감사하는 마음 자체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소중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마음을 드러낼 때, 그 마음을 표현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를 표현하지 못한채 시간이 지나버리면 어느 순간 어색해 지게 됩니다. 오히려 은혜를 끼친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집니다. 인간관계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빚이 쌓이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의 때를 놓친다면, 그 다음의 기회를 잡기는 어렵습니다. 그 당시의 감격과 감동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병을 고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도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알쏭달쏭합니다. 이게 저절로 나은 건지 하나님의 은혜였는지도 햇갈립니다.

우리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은혜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새로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우리 신앙은 굳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즉시 표현해야 합니다.

다윗의 성전

  •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은 우리 문화에서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서양 문화에서는 작은 일에도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문화인가 그렇지 않은가도 요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