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의 본은 김해이다. 김만덕은 평민 신분으로, 때로 기녀라는 말을 들으며 조선시대 왕족이나 양반 남성들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한 여인이다. 본디 김만덕은 제주의 양갓집 딸로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이후 마땅히 의지할 데가 없어 한 퇴기에게 의탁해 살았는데, 나이가 들자 자연히 관아에서 그녀를 관기로 삼아버렸다. 하지만 만덕은 관기로 있으면서도 근검절약해 장사 밑천을 만들었다.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조금씩 일궈갔던 것이다.
스무 살 무렵, 만덕은 거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관기에서 벗어나 다시 양민이 된다. 그러고 모아둔 재산을 밑천 삼아 장사에 뛰어든다. 채제공의 ‘만덕전’에 보면 “그녀는 재산을 늘리는 데 가장 재능이 있어 시세에 따라 물가의 높낮이를 잘 짐작하여 사고팔기를 계속하니, 수년 만에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만덕은 객주를 차린 뒤 제주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도붓장수를 육지로 보내 값이 쌀 때 사서 들여오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우황 미역 전복 귤 등을 육지로 내다 팔았던 듯하다. 그리고 나중엔 배를 여러 척 거느리고 선주 노릇도 했던 듯하다.
만덕 본래 자비심이 두터웠고 근면 절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래서 갑인년(정조 18년) 흉년에는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고, 정조 19년(1795)는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의 시신이 길거리에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제주 사람의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때 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해 뭍에서 곡식을 사들인 뒤 그중 10분의 1로는 친척들을 살리고, 나머지는 관가에 실어보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게 했다. 그러자 제주 사람들이 “우리를 살린 이는 만덕이로다!” 라며 그의 은혜를 칭찬했다.
마침내 구휼이 끝난 뒤 당시 제주목사가 이우현이 만덕의 마음씨를 높이 칭송하고, 이 사실을 임금님께 여쭈었다. 정조 임금이 만덕에게 소원이 있다면 쉽고 어려움을 따지지 말고 특별히 들어주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에 만덕이 “남편도 자식도 없는 몸이라 별 소원은 없습니다. 다만 한번 한양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대궐을 보고 금강산까지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참으로 대범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임금님은 만덕의 겸손에 더욱 감탄하였다.
정조 20년(1796) 만덕이 역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니, 왕과 왕비가 크게 치하하며 상을 내렸다. “네가 일개 여자로 의기를 발휘해 굶주린 백성 1000여 명을 살렸으니 참으로 기특하도다.” 이듬해 만덕이 금강산으로 떠나 천하 절경을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니, 백성은 물론 선비와 공경대부까지 찾아와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자 했다.
이처럼 임금님은 여러 편의와 안내자를 정하여 주며 만덕으로 하여금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게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만덕이 유람에서 돌아오자 별장을 지어 주었고, 영의정 채제공은 만덕에 대한 전을 지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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