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4 영락교회 고별,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막15: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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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막15: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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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연말에 그것도 주일 저녁에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참으로 특별한 분들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은 참 특별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1부 예배부터 지금까지 온종일 봉사하시고, 이제 마지막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도 오늘 하루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몇십 년간 그렇게 섬겨 오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혜가 있기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해 오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기에, 또 그분의 일이기에 이 모든 일을 감당해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계신 분들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분들입니다.

오늘날의 문제
그런데 우리에겐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넘어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어리석은 일로 여기며, 무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교회는 과연 진리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이 놀라운 생명은 교회 담장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담장은커녕 믿음 안에서 자란 자녀세대에게조차 전달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분명한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인데,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선포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이상하게 입술로 전해질 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문제
그러나 이러한 고민은 이 시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이 처음 선포될 때에도, 이러한 문제는 동일하게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고민을 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복음서들이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그 시작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복음의 시작부터, 십자가를 지시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 모든 이야기가 다 하나님의 아들로 시작하고 끝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시험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시험을 받으실 때입니다. 마귀는 간교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시험하는 자로 다가와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 (마4:3)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금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첫 번째 시험 이후에 마귀임이 밝혀졌지만, 거듭하여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때에도 같은 말로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마4:6)

마귀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려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까요? 마귀는 타당하지 않은 제안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매우 합리적으로 예수님께 제안한 것입니다. 당대의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는 가이사의 양아들이었는데, 가이사가 신격화되면서, 신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로마 황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의 황제, 그 당대의 하나님의 아들이 그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원래 공화정이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자 이런 것을 쥐여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빵과 서커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책입니다. 로마 시민이라면 적어도 먹을 것 걱정 없이, 볼거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로마 황제가 끊임없이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당대의 로마의 황제가 했던 것처럼 자신을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볼거리를 제공하고, 그것으로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 왕국을 건설하라 이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유혹을 거부하셨습니다. 당대의 사람들로서는 합리적인 방식이었지만 그분은 세상의 방식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분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까?

성경 속의 대답(은혜)
예수님의 대답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권능을 행함으로, 또는 군중들에게 빵을 줌으로 인정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길은 오직 십자가였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 조롱을 받으셨지만, 그분의 답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세상의 방식대로 세를 불리는 것도, 빵을 주는 것도, 권능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마귀의 유혹에도, 세상의 조롱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신 주님은 오직 십자가로 답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온전히 그 사명을 감당하셨을 때, 로마 황제의 종이었던 백부장이 고백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분을 죽였던 자였습니다. 로마 황제의 은총을 받으며 살아가던 그의 입술에서 나온 말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말이었습니다. 평생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칼에 피를 묻혀왔던 그였지만, 그의 입술에서 나온 고백은 권좌에 앉아 있는 로마의 황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나사렛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고백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서 이 고백을 기록하였습니다. 너무도 중요한 고백이기에, 세 개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답
그렇다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나무 십자가를 들고 다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명동 한복판에 커다란 십자가를 들고 다닌들 그 자체가 주는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택한 것은 세상의 방식을 거부하여 더 낮아지고 희생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무기력해 보여도, 때로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손해 보는 자리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야만 예수님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억울한 것은 우리가 한국 사회에 이바지한 것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를 이런 취급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회 복지에도, 교육에도 기독교가 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왜 이렇게 몰라 주냐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달리하면, 우리가 준 떡이 있는데 왜 인정하지 않는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십자가를 졌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나름의 주장을 해왔고, 이런저런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주장이 십자가가 아니라 기득권의 보장으로 여겨진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계신다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하는 방식대로 저마다의 인정 투쟁을 해서는 교회는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인들, 거리와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할렐루야를 외친다고 한들 십자가의 길이 아닌 한 주님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떡을 주든, 기적을 행하든 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돌로 떡을 만드는 싸구려 기적이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눈요깃거리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자신의 몸을 찢어 떡으로 내어주셨고, 친히 높은 십자가에 매달리어 사람들이 보게 하셨습니다. 자기희생으로 그 진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묵묵히 십자가를 지러 가신 주님의 길을 따라, 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의 자리에 갈 때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는 증명될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이 없더라도, 십자가를 진다면 교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
저는 영락교회 6년간 있으면서 십자가를 지는 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른 시간 교회에 나와서 늦게까지 봉사하시는 분들, 피가 섞인 것도 아니지만 가족처럼 구역 식구들을 돌보시는 분들, 변함없는 모습으로 늘 그 자리를 지키며 섬기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처음 영락교회에 왔을 때는 모두가 익명으로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섬기시는 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교구는 다르고, 부서는 다르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애쓰는 분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빚도 없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곳까지 함께 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신 그 자리에 함께했던 여인들, 갈릴리에서부터 올라왔던 이들처럼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분들을 통해서는 저는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비록 이곳에 세상이 요구하는 화려한 볼거리는 없더라도, 세상이 탐하는 먹을거리가 없다 할지라도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하는 이들을 통해 십자가 드러났고, 하나님의 아들이 계심을 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8:34)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달려나갈 때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딸로 여겨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롬8:19) 그리고 세상은 십자가를 지는 자들을 볼 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우리의 진리는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서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교회를 향하여, 떡을 내놓으라, 기적을 행하라며 세상의 방식으로 증명하라고 하겠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는 영락교회는 주님이 그리하셨듯이 십자가를 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오늘 사임하는 저희 교역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간다면, 저와 여러분은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 언덕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자리에서 백부장의 고백,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십자가를 지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자리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권속들이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에도, 세상의 조롱에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따라가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교회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사, 세상의 정치와 권력이 틈타지 못하게 하시고, 돈의 권세에도 삼키지 않게 하시며 오직 복음의 능력만 드러나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가신 갈보리 언덕에 함께 서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게 하시며, 세상이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소서.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