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31 금요, 죄인으로 기도하기 창16: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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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으로 기도하기
창16: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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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찬양으로 섬겨주신 4교구 4지역, 5지역 성도님들 감사합니다. 주님을 전을 먼곳에서 오셨는데,주님께서 그만큼 더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의 고백대로 우리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은 왜 오셨습니까? 여러 가지 의도와 목적이 있겠지만, 폐일언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이 자리에 나아왔을 것입니다. 기도가 아니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란 믿음이 없다면 이 자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실까요? 어떤 기도여야 하나님이 들으실까? 이런 고민은 진지한 신앙인이라면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관련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지난 날 기도와 관련해서 여러 전설과 무용담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금식해서 능력받았다, 어느 기도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 어디 산에서 기도했다 어려웠던 시절 기도로 모든 난관을 뚫고 해결했던 믿음의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저희 동네 뒷산에서 기도하가 능력받고 목사가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는 장기간 금식기도를 하거나 보좌를 흔드는 장시간의 기도로 어떤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적도 있을 것입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영적 경지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40일 금식기도 일수도 있고, 때로는 보좌를 흔드는 장시간의 기도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하여 얻어내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다 비슷한 패턴입니다. 어느 부흥사 목사님이, 어느 전도사님이, 어느 권사님이 그렇게 기도해서 능력을 받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기도는 마치 정신일도 하사불성, 하면된다는 정신으로 해야할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기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도 자체를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성경을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서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는 것은 부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유목생활을 하는 이 집단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속한 집단 전체의 위기입니다. 장성한 아들들이 있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데, 아브람의 가정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래는 하갈을 이용했습니다. 왜 하갈을 아브람에게 보냈을까? 여러 여종들이 있었을텐데 왜 하갈이었을까요? 하갈이 예뻐서 보냈을까요? 무슨 자질이 있어서 하갈을 보냈을까요? 대를 이어야 하니깐 아마도 임신할 가능성이 높아 보여 보냈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사라가 보기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아들을 낳더라도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깐 제일 만만할 것 같으니깐, 하갈을 골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예상대로 하갈은 임신했지만, 아브람의 집단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습니다. 여주인과 여종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갈이 쫓겨난 것이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이런 하갈의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도망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또 잘한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나름의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와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 주님이 들으셨다는 그말보다 지금 하갈의 상황에 무슨 위로가 있겠습니까?

하길의 기도도 아닙니다. 하갈이 기도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그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갈이 이렇게 저렇게 해주세요 한게 아닌데,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기도에 관한 우리의 사고를 깨뜨리고 있음. 우리가 막연히 갖고 있는 기도에 대한 편견과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편견이 무엇입니까?

1. 기도할 자격이 필요하다
우리가 기도에 오해하는 것은 기도할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떤 법칙입니까? 비인격적인 우주의 원리입니까? 우리 주님이 그렇다면, 기도도 그저 법칙에 따라하면 그만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 졸업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학교에서 정한 학점을 이수하면 되고, 기타 행정적인 절차를 밟으면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다녔는지, 실제로 어떤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그 요건과 기준에 맞으면 될뿐입니다. 절차에 따라 기도하면 응답은 저절로 오는 걸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정해진 공덕을 쌓으면 기도가 따라오는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그런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라 고백한다면, 기도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속에 있는 종교성은 끊임없이 기도를 자격을 채워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한 법칙이 있고, 조건을 맞추어서 응답을 얻는 것이 우리의 종교적 본성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종교나 은혜를 이야기하기보다 공로를 이야기합니다. 공로를 쌓으면, 그 공로만큼 얻는 것이 원칙입니다. 거기에는 기계적인 법칙이 있을 뿐입니다. 자판기에 500원을 내면, 500원짜리가 나오는 것이고, 천원을 넣으면 천원짜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인격적인 관계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돌아볼 이유가 없음에도 그를 돌아보셨습니다. 사라도 아니고, 약속과 상관없는 자임에도 하나님은 그를 돌아보셨습니다. 우리의 종교적 본성과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우리의 두 번째 편견을 만나게 됩니다.

2. 완전한 의인으로서 기도해야한다.
두 번째 편견은 기도는 의로워야만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완전해야만, 의인이어야만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 상태에서 기도해야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오해이기도 하고 핑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아귀가 들어맞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밖에 없는 그런 순전한 상태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를 뒷받침 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잠언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온전해야만, 의로워야만 내가 잘못한게 없어야만, 내가 순수한 피해자야만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광장을 지날 때, 사람들이 몰린 곳에 어떤 사건의 피해자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순수한 피해자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잘못한 것없이 순전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자신의 억울함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 고향이 어디냐, 그 사람 의도가 있다, 어디랑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갈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욕심부린 것 아닙니까? 본인의 잘못도 분명히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성경의 관점이 사라의 자손들의 관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사라와 하갈 사이에 알력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꼬였는지 모르지만, 쫓겨난 하갈은 그저 억울하게 쫓겨난 것입니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다만 그의 지금 상황이 임신한 몸으로 쫓겨나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가 아브람의 아이를 갖겠다고 했던 것도 아닌데,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완벽하게, 의로워야만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오늘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기도자 하갈, 아니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지가 잘못해서 쫓겨난 여인이었던 하갈은 우리의 종교적 편견과는 너무도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환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도대체 어떤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까?

이 가운데, 조심스럽습니다만 순전하게 맞고만 있었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당하기만 했던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겪는 고난이 그저 욥의 고난처럼, 무죄함에도 겪는 고난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손은 이미 더러워져 있습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주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 호소하기에는 우리도 한 일이 있어서 감히 그렇게 설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구원받을 때에만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죄인이었던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우리, 이 세상 속에서 여전히 더럽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서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기도의 자리에서는 그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의인으로 서야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함정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함정은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 의인이라고 착각하여, 마치 자판기에서 버튼을 누르듯이 기도하게 되어버리거나, 반대로 죄인이라고 위축되어서 기도하지도 못한채 기도를 포기해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의롭게 사는 노력이 어느순간 교만이란 죄로 이어지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이 스스로 구원의 자리에서 배제하는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죄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에 대해 가르치실 때 이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바리새인은 자신의 자격을 이야기합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자신의 자격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지를 이야기합니다. 왜 이야기합니까? 내가 의로우니 법칙에 따라, 공로에 따라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다릅니다.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주님은, 두 사람의 기도 중에 세리의 기도를 인정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격있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자꾸 자격을 따지는 버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중에 누가 주님 앞에 감히 서서 의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누가 이 자리에 감히 설수 없는 죄인이겠습니까? 어쩌면 이 자리에 나와 있지만, 기도가 나오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나왔지만 찬양도 부르지 못한채 그저 앉았다 가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기도할 염치도 없고, 기도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기에 차마 주님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하갈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약속의 자손도 아니고, 언약을 이어갈 자도 아니었고, 그 스스로 잘못한 것도 있었는데,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아니 기도라고 할 수 없는 그의 한숨을, 한숨에 담겨있는 그의 체념과 그의 고통을 그의 눈물을 우리 주님은 먼저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건져내신 주님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손이 더럽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자격 없다는 것을 아시지만, 그저 이 자리에 기도도 제대로 못하는데 나온 것도 알고 계십니다만은, 그 주님이 들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입밖에 터져나오기도 전에, 우리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한숨지으며 걸어왔던 그 시간에 이미 우리 주님 들으셨습니다.

갈곳도 없어 무조건 도망쳐 나온 하갈에게 다가오신 주님께서, 현실의 문제에 부딪혀 무장적 뛰쳐나온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고통을 들으셨다. 네 기도가 아니라 네 고통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고통을 들으셨다, 네 고통을 들으셨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하러 나왔지만, 기도를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찬양을 따라하지 못한 분도 괜찮습니다. 엄마가 아이의 눈빛만봐도 숨쉬는 것만봐도 무슨 있었는지 알아채듯이, 우리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리고 자격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며 대화의 자리로 초대해 주십니다. 하갈에게도 먼저 다가와주신 주님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딸에게 먼저 오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아들에게 다가오시지 않겠습니까?

이 시간에 기도가 나오지 않더라도, 찬양이 막히더라도 그분이 이미 들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인임에도 주님 앞에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조금은 당당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고 싶었으나
주춤거리다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기 망설이다가, 기도도 못할 것 알면서도 이 자리에 도망치듯이 온 이도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손이 더럽지만, 주님을 부릅니다. 감히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지만, 그저 한숨으로 대신합니다. 그저 머리를 박은채 엎드렸다 돌아갈 뿐이지만, 주님 앞이기에 나왔습니다.
주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고통을 들어주시옵소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어깨만 들썩 거린채 숨죽여 기도할 때에도 우리 주님 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