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433장, 찬송가 433장 찬양드리심으로 새벽기도회를 주님 앞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시94:1-)
기도 5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새날을 주셔서 주님의 전에 나오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이 주실 은혜를 힘입고자 나온 모든 성도들의 찬양과 기도를 우리 주님께서 받아주시고 새 은혜 주실 것에 미리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그러나 주님, 지난 밤 속상한 마음에 잠들지 못한채 이 자리에 나아온 상한 심령이 있다면 우리 주님의 손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기도가 나오지 않고 한숨만 나온다 할지라도 그 숨결에 담긴 영의 간구를 들으사 주님의 뜻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이 시간, 세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온 인류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매번 뉴스에서 들리는 소식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임을 고백합니다. 퍼져가는 역병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이러한 평안이 실감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로 겸손케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괜찮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나 교만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시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하시고 이 때에 주께서 택하신 이 나라, 주님이 세우신 나라 대한민국이 열방을 향하여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이익을 셈하며 돕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 뜻대로 감당하며 이 기회를 통해 장차 선교의 문들이 열리게 하여 주옵소서.
이 나라가운데, 코로나로 생업에 어려움에 겪는 이들이 있습니다. 도움의 손길들이 임하게 하여 주시고,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적절한 치료가 제공되며 회복의 날이 속히 오게 하여 주옵소서. 방역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의료진과 당국을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고 위기를 극복할 힘과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그리고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산성교회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이 여정에 함께 하며 동행하고 있는 산성의 모든 성도들을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고, 이 가운데 하나도 빠짐 없이 믿음의 항해를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구하옵기는 원로 목사님을 기억하사, 신원을 강건케 하시고 주님과 늘 동행하게 하옵소서. 담임목사님을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잘 전하게 하시고, 말씀의 권능으로 세우고 살리는 일들을 잘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당회원들을 기억하사 주님의 역사를 분별하며 동참하게 하시고, 여러 성도들을 권면하며 교회의 여러 일에 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모든 교역자들이 담임목사님을 도와 맡겨진 영혼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며 사랑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게 하시고, 기쁨으로 씨를 뿌리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제직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섬기는 부서들 마다 섬김의 기쁨이 넘치게 하시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그 속에는 친밀한 교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구역들을 돌아보아 주셔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피난처가 되게 하여 주시고, 수고하는 지역과 구역의 일꾼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비록 지금은 코로나로 많은 것이 제한되어 있으나, 그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방법을 찾게 하여 중보소서.
우리의 다음 세대가 자라가고 있는 교육부서들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대가 넘치게 하시고, 이 세상 속에 위축되지 않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지게 하소서.
또한 먼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고, 그들의 사역와 가정가운데 평안을 주셔서 안전한 가운데 그 모든 사역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저희가 중보하는 선교사와 기관들이 있사오나 주님, 우리가 그 사정을 다 알지 못하고 때로는 돌보지 못할 때도 있사오나 경계를 넘어 역사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물리적, 지리적 한계를 넘어 선교의 역사 가운데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역병 속에서 선교사님들과 그 가족들, 섬기는 분들을 지켜주셔서 무사히 넘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주님, 이 자리에 나온 산성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새로운 아침을 열며 기도로 시작하는 이들의 심령을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주시고, 이들의 육신에 생기가 들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삶의 여러가지 간구와 기도의 제목들을 갖고 이 자리에 나아갑니다.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올려드릴 때 주님께서 판단하여 주시고, 주님의 천군 천사들을 동원하여 그 문제가 풀리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병상에 있어서, 여러가지 사정으로 나오지못한 성도들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시고, 그들이 작은 소리로 주님을 부를 때에도 우리 주님 크게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말씀앞에 반응하게 하시고, 결단하여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가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 삶을 판단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선입견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의 고집과 편견을 해체하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새창조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별세자 광고입니다.
104구역 최선아집사님의 부친되시고, 조용재성도의 빙부되시는 최경국집사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1호실이고 위로예배는 오늘 오전 10시에 드립니다. 9시 15분에 교회에서 출발합니다. 슬픔을 당한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94편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94편의 말씀을 한절씩 교독하고 마지막절은 같이 읽겠습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도입: 본문의 장르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94편의 말씀은 민족 탄원시, 또는 공동체 탄원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탄원, 탄식의 기도를 올려드리는데 그 내용이 개인적인 고난과 괴로움이 아니라 공동체적, 국가적인 난국을 다룬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시편에는 이러한 민족 탄원시가 여러 편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편들은 우리의 믿음이 단지 이 땅과 상관없이 그저 심리적인 평안을 다루거나, 개인적인 체험이 전부가 아님을 가르쳐 주는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가려져 있는 공동체의 현실을 처절하게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시편이기도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공동체 탄원시의 전통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교회 기도회 시간에는 항상 나라와 민족을 위한 순서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매번 기도회를 하는데 그 순서가 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대표기도에도 탄식과 기도가 담기기도 합니다. 물론 그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현실 가운데 역사하셔야 한다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 탄원시는 우리와 동떨어진 시가 아니라 현실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우리의 기도와 이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질문
본문에는 두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왜 복수하는 하나님인가? 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시편의 기자의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복수하시는 하나님, 복수하시는 하나님 을 두번이나 부르며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기자는 무엇이 억울해서, 무엇이 그렇게 고통스러워서 소리치고 있습니까? 복수하시는 하나님, 어쩌면 우리가 흔히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주님을 고백하는데, 우리의 고백과는 다른 생경함이 오늘 본문에서 느껴지고 있습니다. 왜 오늘 시편의 기자는 복수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초대기독교 이단 중에 마르시온이라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의 사랑의 하나님이며 다른 존재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원수들까지 사랑한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과 악한 자들을 진멸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같은 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이 곧 신약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런 주장이 말이 안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은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편한 모습의 하나님만 담고 있습니다. 무조건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만을 우리는 주목하게 되는데, 분명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이며, 복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오늘 본문에는 복수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오늘 두번째 질문이 등장합니다. 바로 악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시편의 기자가 복수의 하나님을 부르는 이유는 2절부터 등장하고 있습니다. 2절에는 교만한 자들이라고 가리키고 있는데, 3절부터 7절까지 더욱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2절의 교만한 자는 3절의 악인이며, 4절에 오만하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인데, 이들이 한일은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짓밟고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고와와 과부, 나그네는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그 사회 속에서 가장 약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한 자들이 가장 약한 자들을 해치고 있기에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과부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들의 피값을 찾으시며, 이들의 대리자가 되어서 복수하여 주실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르의 문제
그런데 이러한 불의한 자들에 대해서 오늘 시편의 기자는 공동체 탄원시라는 형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동체 탄원시는 공동체의 위기, 민족의 어려움 속에서 쓰여지던 시입니다. 보통은 전쟁의 위협속에서 이방 민족들이 쳐들어 오는 상황 속에서 사용되던 시입니다. 대체로 공동체 탄원시라고 하면 당연히 이방민족이 쳐들어왔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적국이 쳐들어와 목숨을 노리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공동체의 위기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턱 밑에 칼이 다가온것과 같은 다급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안해 보입니다. 저기 멀리 국경의 수비대가 방비하고 있고,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군대도 강하고 성벽도 든든하게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읍 한 구석에서는 불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일을 시편의 기자는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이야기 하고 있지만, 오늘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사로잡고, 그들을 죽이는 자들을 보면서 마치 적군이 쳐들어 온것과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악한 자들은 어떤 자이기에 오늘 시편의 기자는 복수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주님께 호소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정체는 20절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제가 2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바로 본문에 나오는 그 악한 자, 교만한 자, 고아와 과부를 죽이며, 나그네를 해치는 자, 그자의 정체는 바로 악한 재판장이었습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의 칼이 되어서 악한 자를 벌해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강탈하는 자들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듯한 법을 만들고 – 율례를 빙자하고, 사건을 꾸며서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기자는 이러한 현실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악한 재판장과 이들이 활개치는 악한 사회를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한 재판관들을 미워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칼을 들고 훔치는 자들은 누구나 쉽게 알아보고 처벌받게 되지만, 교묘한 법논리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들은 처벌받지 않습니다. 똑 같은 죄라도 누구는 처벌을 받지만, 누구는 처벌받지 않습니다. 교묘한 법논리를 구사하며, 재판관들과 연줄이 있으며, 이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은 법의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전관변호사니, 향판이니 하는 것을 당연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누군가에는 법이 오랏줄과 같이 묶어버리지만 누군가에게는 거미줄에 불과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현실이 정상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심판하시듯이, 하나님의 백성들-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신다는 것입니다.
적용1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현실을 그저 정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마치 적군이 코앞까지 쳐들와 그들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시편의 기자의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 겸손히 서서 우리의 죄악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약한 자들이 당한 억울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무관심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적군이 칼로 위협하지 않더라도, 억울한 자들의 호소에 우리 주님이 칼을 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히 주님의 대적이 되지 않도록 연약한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적용2
다음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만일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 우리의 기도가 일부러 꾸며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소 거친 언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며, 복수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신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억울한 일에 대하여 이 모든일의 최종 심판자이신 주님께 호소하는 것이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피눈물흘리게 한 자들에게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 가운데 혹시 억울한 일을 당한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 정직하게 아뢰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순한말로 꾸미지 않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들으시고 함께 하시며, 여러분을 향하여서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주변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 있습니까? 그냥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 내 목에 칼이 겨누어진 것으로 여기며 그 일을 놓고 기도할 때,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 새벽에 그렇게 94편의 기도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신원하시는 주님
억울한 자들이 흘린 피의 호소를 들으시는 주님, 우리가 그 호소를 외면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불의한 시대를 당연히 여기지 않게 하시고 재판장되시는 주님께 그들과 함께 호소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때로는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이 자리에 나와 한숨짓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님 그 한숨의 무게를 셈하여 주시고, 그 눈물을 계수하셔서 그 아픔을 덜어주시고, 주님의 공의가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기도1
오늘 이 아침에 주님 앞에 기도하실때에 각자 가져온 기도의 제목들도 기도하시겠지만 먼저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기도하기 원합니다. 이 나라가 처한 위기는 주변의 날선 검일수도 있으나 우리 안의 불의, 고아와 가난한 자와 과부와 나그네가 겪는 어려움이야 말로 진짜 위기일수도 있습니다. 주님 이 땅에 주님의 정의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2
또한 우리 중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놓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여기서 나의 억울함을 주님께 호소하셔도 좋지만, 먼저는 형제와 자매의 억울함을 먼저 주님께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도3
그리고 코로나 19상황을 놓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계적인 재난 속에서 미국과 유럽의 여러나라들, 그리고 우리 선교사님들이 계신 나라들에도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선교지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어려움 속에 있는데, 이 역병이 그치게 하시고, 수고하는 모든 당국자들과 방역책임자들, 의료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 가져오신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신 후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