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1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23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23:1-6

도입: 우리가 사랑하는 말씀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성도들이 특별히 사랑하는 말씀, 인생의 여정에서 붙잡고 가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들기도 하고 어떤 분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말씀을 붙잡기도 합니다.

심방을 갈 때, 특별히 준비한 말씀이 그분의 평생의 말씀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저 말씀만 읽어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그 말씀과 함께 지내온 여러 순간들이 생각나서 그럴 겁니다.

시편 23편은 그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아니, 의지하는 말씀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말씀은 달라도 있지만, 우리 삶을 돌아보게 되는 그 순간에는 이 말씀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가는 숨을 내쉬는 분들과 이 말씀을 나눌 때도 있습니다. 우리 신앙을 돌아볼 때에, 가장 마지막 순간에도 붙잡을 말씀을 이 밤에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서정적이고 목가적으로 느껴집니다. 말씀을 읽기만 해도 풀밭이 그려지고, 어린 양을 안고 있는 예수님이 그려집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누구보다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들에서 보냈던 시간 어린 다윗에게 그 날들은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홀로 있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장성하여 전장을 누빌 때에도, 화려한 왕궁에 거닐 때에도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어린 양이었고, 들판에 서 있는 목동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고백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먼저 1절에서 3절까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아멘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라 고백합니다. 목자.. 다윗에게 목자라는 말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아 고백합니다. 어린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바람 부는 날에도, 추울 때에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습니다. 어린 다윗에게 지워진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양떼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엔 그저 풀밭에 누워 풀피리를 불고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목자의 일은 고단합니다. 양들이 먹을 풀밭을 찾아야 합니다. 물도 적당히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양들을 노릴 짐승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언제 늑대와 승냥이가 양을 노릴지 모릅니다. 그 외에도 때가 되면, 털도 깍아야 합니다. 새끼를 낳을 때면 산파노릇도 해야 합니다. 따뜻하게 지푸라기라도 깔아야 하고, 추우면 뭐라도 덮어주어야 합니다. 좋은 날에도 좋은 날 대로, 궂은 날에 궂은 날대로 돌보아야 합니다. 그 일이 끝나기까지 결코 양떼를 떠날 수 없습니다. 목자의 책임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무엘 선지자가 왔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집안 식구들이 다 모여 제사를 지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그분이 어떤 축복을 내릴지 기대했을 겁니다. 그때도 다윗은 갈 수 없었습니다. 다윗도 사무엘 선지자님께 기도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위의 형님들이 다 모여서 제사드리는 그 날도 다윗은 들에 나와서 양떼를 돌봤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막내를 찾아서 그제서야 아버지가 불렀습니다.

전쟁이 났을 때도 양떼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갈 수 없었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와 용감한 사람들이 전쟁에 나갔습니다. 형님들이 전쟁터에 나가 그 용기를 증명할 때에도, 다윗은 양떼를 돌봐야 했습니다. 다윗에게 그럴 기회는 먼저 오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생사를 확인코자 겨우 나설 수 있었습니다.

양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그렇게 무거웠습니다. 양떼의 목숨이 목동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어린 다윗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심지어 사자와 곰이 습격할 때도 있었습니다. 도망치고 싶을 때에도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싸워서 양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 책임이 바로 양을 돌보는 목자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를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에는 목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양떼를 책임지는 목자, 우리를 책임지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어린 목동도 제 양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 어린 것이 하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양을 지킵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다윗은 그렇게 고백합니다. 가장 좋은 길로, 그분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인도해 나가십니다. 포른 풀밭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1절에서 3절까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오늘 본문의 첫번째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4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여기에 오늘 본문의 두번째 핵심이 나옵니다.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길인데, 때로는 어둡고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외진 곳으로, 험한 길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꼭 그 길을 지나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야만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위험해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양들은 그걸 알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좋은데로 다니던 목자가 왜 험한 곳에 들어가는지, 왜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서는 알지 못합니다. 저기 있는 검은 것이 바위인지, 늑대인지, 어디서 뭐가 튀어날지 몰라 두렵습니다.

양들은 그때 주춤거립니다.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니 뒷걸음질 칠 수도 있습니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길도 모르면서 다른 길로 도망치려고 합니다. 목자가 옆에 있음에도 자기 홀로 길을 찾겠다고 도망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망간들 갈 곳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들이 처한 문제입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면서 염소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이 농사를 맡고, 누님이 살림을 맡으면, 제가 짐승을 맡았습니다. 스무 마리 정도 울타리에 가두어 키웠습니다. 짐승들이 은근히 손이 갑니다. 사료와 물도 주어야 하지만, 소금도 넣어주어야 합니다. 겨울에는 더 신경써야 합니다. 날이 추우면, 새끼를 따로 둬야 합니다. 염소들틈에 새끼가 깔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끼는 따로 장에다가 넣어두고 보온등을 켜줘야 합니다. 그런데 염소새끼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깔려 죽을까봐 따로 두는 건데도 겁이 나서 음메~ 음메 거립니다. 바둥바둥 거리면서 도망치려고만 합니다. 새끼 염소가 보기엔, 왜 저런 곳에 두는지 모릅니다. 어미 품에서 왜 떨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새끼를 살리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 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료를 주러 들어갈 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사료를 들고 낑낑거리며 들면 염소가 몰려듭니다. 조금이라도 먼저 사료를 먹겠다고, 저를 에워쌉니다. 그런데 그 틈에 문으로 도망가는 놈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날은 저녁 내내 뛰어 다녀야 합니다. 추수가 끝난 논에 염소가 이리저리 뛰어 다닙니다. 먹을 것도 변변찮아 남은 짚단과 벼 밑둥을 먹습니다. 사료에 비하면 영양가도 없고, 먹을 것도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저도 뛰어가 염소를 몰아야 합니다. 그러다 우리 근처로 오면 회유를 시작합니다. 사료 바가지를 들고 가면 슬금슬금 따라옵니다. 그렇게 사료바가지를 들고 뒷걸음질치며 들어가면 염소도 따라 들어옵니다.

겨울에 밖에 먹을 것도 없는데, 추운데 밖에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염소는 그저 나가고 싶은 겁니다. 어린 염소새끼든, 다 큰 염소든 간에 말 안 듣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들은 목자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저들을 위해서 하는 일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의 의도를 알지 못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왜 이런 길로 이끄는지 자기 딴에 연구를 해봐도 알 수 없습니다. 왜 목자가 옆에 있는데 왜, 왜, 왜를 외쳐도 그 이유는 모릅니다. 이유를 모르니 망설이게 됩니다. 두려워합니다. 더 지나게 되면, 이곳으로 인도한 목자를 원망하게 됩니다. 더 좋아 보이는게 있는데 왜 여기로 왔는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자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들짐승이 나타나도 목자가 지팡이로 쫓아낼 것입니다. 혹여나 구덩이에 빠진다 해도, 막대기로 끌어 올린다는 것입니다. 목자 옆에 있다면, 목자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양이 고민해야 할 것은 이곳이 어디냐가 아닙니다. 그건 양이 고민할 문제가 아닙니다. 양이 자기 나름 분석하들 뭐가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지 못해도, 목자만 신뢰한다면 인도하는 목자만 따라가면 됩니다. 지금 당장은 겁이 난다 할지라도, 목자 옆에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목자를 따라갈 때에, 주어지는 은혜를 고백합니다. 5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3. 내 잔이 넘치 나이다

바로 오늘 시의 세 번째 핵심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다윗은 이제, 이 시가 그저 양과 목자의 이야기가 아님을 드러냅니다. 실은 자기 삶의 고백을 드러냅니다. 목자되신 주님, 그분의 인도를 따라갈 때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 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에게 부어주신 은혜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겐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한낱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양을 돌보던 다윗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습니까? 형제들 중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막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까? 싸움에 나서지도 못하던 자가 어떻게 외적을 무찌로 나라를 안정케 하였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리 저리 궁리해봐도 그가 이런 은혜를 받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기에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는 이처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런 걸 받은 사람이 아닌데, 내 삶을 보면 하나도 선한 게 없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그것이 다윗의 고백이었고, 우리 모두의 고백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이들의 고백, 지금도 주님 안에서 잠자고 있는 자들도 함께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기에,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고백으로
이제 이 고백을 우리가 해야할 때입니다. 이 고백이 은혜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입니다.

오늘 어떤 분들은 아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여정 중에 왜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지 못해 소리칠 때도 있고, 때로는 후회 속에 스스로를 괴롭게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곳에 인도한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늘 풀밭에만 거할 수 없습니다. 장차 해가 지게 되고, 이곳의 풀도 떨어지게 되면, 목자의 인도에 따라 다른 곳에 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족하고 감사한 것도 시간이 지나면 떠야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겁먹게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디 있는지 분석하고, 어떻게 해야할 지 계획을 세우기 전에 목자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목자를 따르고 있는가? 목자되신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함께 있다면 여러분은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제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목자가 없다면, 제 아무리 초장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자리입니다. 심지어 에덴 동산처럼 보이던 곳이라 할 지라도 곧 파멸이 임하는 자리 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지역이 예전에는 여호와의 동산, 곧 에덴 동산과 같아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있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냐가 중요합니다. 바로 목자와 함께 있냐가 우리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미 주님 곁을 떠나간 분들도 있을 겁니다. 울타리를 벗어나 멀리왔다 할지라도, 무리에서 떨어져 있어 돌아오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멀리 떨어질 곳에 있다 할지라도, 목자를 찾는다면 그 소리를 듣고 찾아 오실 것입니다.

생의 마지막이라도
이미 늦었고 끝난 것 같아도,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는 때가 되었다 할지라도 아닙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부른다면, 목자되신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찾아 오시기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숨이 가늘어져 끊어져 가는 그때에도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푸른 초장으로, 주님의 집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 앞에서, 감사하며 그분과의 잔치를 누리며 고백할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차 우리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게 될 때에 우리가 이 고백을 드리기 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여기까지 지내 온 것이 은혜였다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오늘 이 자리에서, 먼저 그 고백을 올려드리기 원합니다. 비록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둡고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우리 옆에 계신 주님, 우리 앞에 인도하시는 주님, 그렇게 우리를 안위하시는 주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목자되신 주님, 목자되신 주님, 주님을 부를 때 그 소리를 듣고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건져주실 겁니다. 인도하여 주실 겁니다. 이밤에 그 분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겁니다. 이 밤,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 이 밤에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의 인도를 믿지 못하고 헤메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이제라도 그 울음소리를 듣고 우리에게 임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믿고 따라가며, 어디로 간다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