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증거
창세기9:8-17
창9:8-17
자연 재해 앞에 무력한 우리
며칠간 태풍으로 남부지방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위성으로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수해를 막기 위한 시설이 있어도 막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도 갑작스런 비로 터널과 지하철이 잠겨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지만, 비가 몇 시간 만 많이 내려도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인간이 과학기술을 자랑하지만, 그 능력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재난 앞에서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시스템도, 기술도 힘을 잃습니다. 이번에는 잘 막았을지 모르지만, 다음에도 잘 막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코로나와 싸우느라 정신없지만, 기후변화 위기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날씨만 하더라도 우리가 익숙하던 패턴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지구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고, 빙하는 녹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재난도 곧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세계 곳곳에서 유래없는 가뭄과 홍수를 겪고 있고, 삶을 터전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본문의 중요성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흔히 성경을 약속의 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과 구약이라고 부릅니다. 그 속에 수많은 약속이 있고, 우리는 그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약속으로 믿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책이 성경입니다. 오늘 그 약속 중에서 재난을 당한 자들에게 주신 약속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이후에 복을 주시면서 하신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노아 언약, 노아 계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주일학교시절 노아의 방주를 배웠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이 본문을 잘 다루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나,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 약속도 아브라함이나, 다윗에게 주신 약속만큼 중요합니다. 아니 그 약속들의 전제가 되는 약속이 바로 오늘 본문의 약속입니다. 오늘 본문의 약속은 다른 모든 약속의 전제가 되기에 도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약속, 노아에게 주신 약속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의 말씀은 홍수가 끝나고 배에서 내린 후 주신 말씀입니다. 본문이 속한 창세기 1-11장에서는 인간이 실패하는 과정을 처절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 노아가 겪었던 홍수는 참혹했습니다. 인간의 죄가 그저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멸망, 아니 모든 생명의 파멸로 이어졌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저 자기의 죄의 결과만 영향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까지 책임이 전가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이토록 참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과 모든 동물들을 태우도록 했습니다. 죄로 인해 파멸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작은 소망을 주셨던 것입니다.
방주에서 나왔을 때 노아와 그 가족들은 어떤 마음으로 나왔겠습니까? 우리는 살았다 하면서 환호성을 치면서 방주 밖을 뛰어나왔겠습니까? 이제는 꿉꿉한 방주 속에서 살 필요 없다면서 즐거워했겠습니까? 재난 속에 살아 남은 자들도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정신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을 제외하면 알던 이들이 다 죽어버렸습니다. 집도, 밭도 모든 삶의 터전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땅은 진창이 되어버리고, 뻘밭이 되어버렸습니다. 익숙했던 지형도 다 바뀌어 버렸습니다. 기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익숙했던 날씨도 변해버렸습니다. 그들이 오랜 세월 익숙했던 날씨가 아니었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분노해서 심판을 하실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그들이라고 가만 놔두시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구원의 기쁨보다도 앞으로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그보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어떻게 살아야할지 근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노아 언약입니다. 노아 언약은 세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번째, 노아 언약은 온 인류와 모든 생물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성경의 여러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속들은 대상이 제한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또 다윗에게 주신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도 영적인 후손으로서 그 약속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 대상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온 인류와 생명들과 세운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에게도 주신 약속입니다. 심지어 하늘을 나는 새들과 땅에 있는 짐승들과도 세운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숨을 보존하시겠다는 약속, 더 이상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라고 동물과 식물들을 그냥 죽여도 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 또는 우리 인간들은 모든 생명을 대표해서 주님 앞에 서있을 뿐, 이 언약의 당사자는 모든 생명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신다는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생명들도 보존함이 주님의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욕심을 위해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가 됩니다.
들에 핀 꽃들, 하늘을 나는 새들도 아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마6:29) 그만큼 우리 주님께서 아끼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노아 언약은 전적인 은혜의 약속입니다. 전적인 은혜, 오직 은혜로 주신 약속이 바로 노아의 언약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언약은 특별합니다. 계약은 항상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의무가 포함됩니다. 서로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다른 언약들도 그렇습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맺을 때에도, 그들이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계약의 당사자로서 할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노아 언약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하실뿐,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을 저지르면 이 약속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바로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해드린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 제한하십니다. 물로 심판하셔도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우리지만, 그런 우리를 위로하시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스스로 제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심판하실 수 있으나 오래 참으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스스로 제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어린 인류에게 너 한번만 더 죄지으면 다 없애버릴거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전적인 은혜의 약속을 주시며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연약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행동에 조건을 달지 않으시고, 자신의 신실함에 근거를 두어 약속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노아 언약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노아 언약의 세번째 특징은, 바로 무지개라는 언약의 증거입니다.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대에는 언약을 맺을 때, 증인 또는 증거를 두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지금도 약속을 할 때 증표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반지를 왜 하십니까? 귀금속이라 한 몫 챙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서약을 지키겠다는 증거로 삼기 위함입니다. 늘 그 증표를 들고 다니며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결혼 반지처럼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언약의 증표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 증거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사사 기드온도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도저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양털에 이슬이 뭍나 안뭍나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습니까?
히브리 인들에게 무지개는 활과 같은 단어입니다. 무지개 자체가 활모양이지 않습니까? 활시위를 걸어 팽팽해진 모양이 무지개의 모양과 같습니다. 고대인들은 저 하늘에 걸려 있는 무지개가 어쩌면 활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활에 이미 줄이 감겨 있고, 언제 인간을 향해 발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이제 언약의 증거로 삼입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모든 생명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 약속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한하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보며 그들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약속을 모든 생명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비가 오고 다시 물의 심판이 온 것은 아닌지 불안해 진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비록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무지개를 약속의 증거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무지개를 보고 심판을 거두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의미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노아의 언약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먼 옛날 동화같은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위기의 상황에 우리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기에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언제 재난이 덮쳐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 편하게 살고자 이 땅을 망가뜨려왔습니다. 지금의 삶의 수준을 지구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코로나지만, 다음은 어떤 재앙이 올지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재난으로 인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낙심할 때 더 이상 삶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자포자기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신 증표를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그래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방주가 아니라 무지개
흔히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방주 모양으로 짓기도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면, 방주는 부족합니다. 노아의 가족만 살린 방주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쩌면 저 방주 밖은 다 죽을테니 우리만, 생을 보존하자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방주를 이야기할수록 자기들만 살겠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모든 생명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이 땅에 언약을 주셨습니다. 노아를 통해 주신 언약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기억하는 교회는, 이 땅을 향해 아직 주님의 약속이 유효하다고 전해야 합니다. 바로 교회가 언약의 증표,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생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파괴된 자연, 그리고 시들어 가는 것들로 이 땅이 가득차 있습니다. 이 땅은 그렇게 오늘도 탄식하고 있고,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중략)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 그래 저기에 생명이 있어 소망이 있어, 교회가 있는 것을 보니, 우리가 망하지 않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살아 숨시는 모든 생명체들이 교회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 그 아들들이 살리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전에 참새가 깃들어 살 듯, 이 땅의 교회가 모든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너른 품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생명의 상징이 될 때, 십자가를 무지개 보듯하게 될 때, 교회는 그 사명을 감당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의 죄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약속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무지개를 허락하십니다. 심지어 말 못하는 짐승들까지도, 들에 핀 꽃과 돌틈에 난 작은 풀들까지도 우리 주님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 하늘의 나는 새도 아끼시는 하나님, 그 모든 피조물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 언약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복음에는 이러한 큰 은혜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이처럼 은혜의 언약입니다. 우리의 행위여부에 조건을 달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제한을 둔, 일방적인 약속 은혜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언약의 증거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그리고 이 땅의 교회가 언약의 증거, 무지개가 되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소망이 되길, 살리는 손길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 작디 작은 바이러스도 감당못하는 저희들입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장차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갈 이 땅에 주님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주님의 크신 계획으로 살려주시고, 회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재난을 당해 상심한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회복케 하여 주옵소서. 이 땅의 교회가 구원의 방주를 넘어 언약의 증거로, 구원의 무지개가 되게 하여 주셔서. 모든 피조물들을 살리는 역사에 쓰이게 하여 주옵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