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6 금요 그들을 내쫓으시고 (막1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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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내쫓으시고 ( 막11:15-18 )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도입 (생경하고 해석이 갈리는 본문)
여러분은 상을 엎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전에야 밥상을 엎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시대가 변했습니다. 밥상이 엎어지고 밥그릇이 날아다니는 모습은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밥상이 아니더라도, 회사 책상을 엎어버리는 상상을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상상만 하지 실제로 하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든 간에, 상을 엎어버리는 일은 큰소동입니다. 그것이 밥상이든, 아니면 책상이든 간에 위에 있던 것들이 다 쏟아 지고, 난리가 납니다. 주변 사람들도 달려올 겁니다. 왜 그러냐며 말리는 사람도 있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조금 떨어져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몰려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동이 성경 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온유하신 분,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께서 상을 엎는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생애에 격렬하게 분노를 드러내신 사건을 바로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으시는 장면입니다. 조금은 생경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온유하신 주님께서 성전에서 이런 소동을 벌이셨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미술사의 여러 해석
우리만 의아한게 아닙니다. 서양 미술에서 여러 화가들이 본문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으나, 그들의 해석도 여러가지로 나옵니다. 여러 화가들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하는데, 어떤 화가는 예수님이 그렇게 격렬하게 하셨을리가 없다고 생각해 다소 점잖은 모습으로 채찍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어떤 화가는 허리를 돌리고, 상대를 향하여 쓰러질 듯이 그려 역동적으로 묘사합니다. 어느 화가는 주먹을 쥐고 때리려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이처럼 해석이 갈리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 그처럼 낯설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애를 묵상할 때, 이 사건은 한번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본문은 십자가를 지신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어디 갈릴리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한복판에서 일이 일어난 일은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유대인들은 빠르게 움직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합니다.

그날의 소동이 어떤 의미인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알겠습니까? 2천년이 지난 우리도 그 사건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성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그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날이라고 성전이 특별히 달랐던 것도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의 성전은 매우 화려했고 그 규모도 대단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해외에서 순례를 왔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거기에 막대한 성전세가 이곳에 모였습니다. 성인 남성은 반 세겔씩 내는데 워낙 금액이 많다보니 로마군대가 지킬 때도 있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제사장은 진중한 모습으로 제사를 집례했을 것입니다.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이 순찰을 다니며, 위세를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규모와 장식에 감동한 순례자도 있을 것이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매우 보수적인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데, 그때는 더했을 것입니다. 비롯 헤롯 대왕이 다윗의 자손도 아니지만, 그는 거대한 성전을 지어 유대인의 환심을 샀습니다. 로마도 헤롯이 지은 성전을 활용하였습니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지만, 유대인들의 종교는 존중하는 듯 보였습니다. 비록 로마 총독이 잔혹하게 굴 때도 있지만, 폭동을 우려하여 종교적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비록 정치적인 자유는 없지만, 종교적인 자유는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있고,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에서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다만 대제사장의 임명은 로마가 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성전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화려한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듯했고, 엄숙한 제사의식은 영적인 체험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인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이 보시기에 성전의 모습은 어느 것 하나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정상으로 여기며, 일상적으로 성전에서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을 만큼 분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들은 성전에 제사를 드리려는 자들을 위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온 사람이 제물을 갖고 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제물을 사야했습니다. 경제력에 따라서 소나 양을 사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샀습니다. 환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 돈에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작은 우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바칠 수 있는 깨끗한 돈으로 바꿔야 합니다. 비둘기를 파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둘기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것은 장사를 했기 때문일까요? 상행위 자체가 문제였을까요?

1. 기도
오늘 사건의 단서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장사꾼들이 폭리를 취했습니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관의 허가를 받았는데 저렴하게 팔겠습니까? 제물을 성전에 바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제사장이 판단합니다. 제사장이 흠이 있다하면, 그 제물은 바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면, 돈을 벌 기회가 생깁니다. 성전에서 뒤를 봐주는 장사꾼에게 사면 합격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합격시키면 돈을 벌기가 아주 쉬워집니다. 비싸더라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파는 가격은 더욱 올라갑니다. 특히 유월절과 같은 명절에는 수많은 사람이 올 것이고 사람들과 함께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성전이 가득찼을 것입니다. 거기에 호객하는 사람들과 흥정하는 사람들로 시장통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돈있는 사람은, 더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비둘기마저 비싸게 팔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시세의 스물 다섯 배나 비싸게 판적도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그 돈을 감당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닭 한 마리에 50만원주고 사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당시 어느 랍비는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비둘기를 바치지 말라고 해석할 정도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성전이 상업화되고, 장사꾼들이 폭리를 취하면서 기도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돈을 갖다바치지 않고서는 예배드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상인들과 한통속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뜯고 있는 제사장들과 그 무리는 성전에 붙어 있는 돈귀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제물을 팔아 뜯어 내고, 성전세는 성전세대로 뜯었습니다.

성전은 영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에서 번 돈으로 로마에 상납해서 자리를 지키고, 그렇게 지킨 자리로 또 돈을 벌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들의 처소는 성전 장사치들의 장마당이 되어버렸습니다.

2. 만민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여기까지만 읽으면 반만 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란 말씀은 이사야서 56장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초점이 조금 달라집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이 말씀의 문맥을 살피면 마지막 때에 이방인들과 쫓겨난 자들이 주님의 성전에 올라와 예배드린다고 말씀합니다. 혈통의 유대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붙잡은 자들이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주님께 나오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서의 초점을 “기도”가 아니라 “만민”에 둘 수 있습니다.

장사꾼들이 차지한 곳은 바로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비록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성전에 머물 수 있는 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제사장들이 돈을 좀더 편하게 벌려고 성전 밖에 있던 시장을 안쪽으로 이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방인이 성전 안쪽으로 넘어가면 성전을 더렵혔다고 죽일 것인데, 이방인들은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장사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그들이 이방인이 예배드리지 못하게 한 것도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성전은 유대인의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방인들에 대한 생각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일뿐, 이방인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이방인들을 성전 밖으로 내몰아 버린 것이 바로 그들의 죄였던 것입니다.

적용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흔히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돌로 지은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성전이고, 예수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가 성전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병들고 타락하게 될 때 우리는 초점을 어디에 맞춥니까? 장사에 집중합니다. 바로 교회의 세속화, 상업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교회를 수익사업으로 만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세습하고, 교회를 사고 팔합니다. 교회를 대상으로 각종 수익사업을 운영합니다. 신앙과 세상 성공을 교묘하게 섞으면 교회에서 영업하기가 수월해 집니다. 그 모습을 탄식하며, 비판을 합니다. 그런 것은 한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업장으로 만드는 이들, 교회에서 이득을 얻으려는 이들은 당연히 지탄받아야 합니다. 그들의 상을 엎어버려야 하고, 그들의 의자를 치워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내어쫓지 않고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의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 말씀에 의지해서 장사꾼들을 다 쫓아낸들, 그들의 상을 엎어버렸다 한들 성전이 만민이 나아오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혹시 우리도 모른채, 우리의 교회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고 주님께 나아오지 못하게 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오기에 불편하지 않는지, 누군가는 묘하게 이질감을 느끼고 차별을 받는 것은 아닌지, 용기를 내어 왔는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끼리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방인들이 예배드릴 곳이 사라진 것처럼. 우리끼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하등 불편함이 없는데, 누군가 우리와 다른 사람이 올 여지가 없어졌다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배척하고, 주님께 나아오지 못하게 했다면, 실은 우리가 그들을 내쫓은 것입니다. 우리의 책상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했고, 우리의 의자는 원래 그들이 앉아야할 자리인 것입니다. 그들의 자리를 우리가 차지하고 있었다면, 그들의 예배드릴 것을 우리가 빼앗았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을 엎어버리고, 우리의 의자를 빼앗아 버리실 것입니다.

이곳에 아무리 의자가 많다고 한들, 연약한 자들이 나아오지 못한다면 주님께서는 치우시고, 우리를 교회 밖으로 쫓아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성전, 주님의 몸된 교회가 본질을 잃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시듯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아무 쓸모 없어진 예루살렘 성전이 결국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듯이, 제 아무리 규모를 자랑하고, 대단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고, 재정적으로 탄탄한 교회라 할지라도 본질을 잃어버리고, 연약한 자들, 우리와 다른 이들을 품지 못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쫓아내실 것입니다.

세속화를 비판하는 것은 그나마 쉽습니다. 탐욕에 찌든 이들은 쉽게 눈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악다구니 속에 이방인의 자리가 사라지고, 장사꾼들의 농간에 가난한 이들이 밀려납니다. 가난한 자들과 이방인들- 보이지 않는 이들의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내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리를 마련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심판을 유예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미워하신 일을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그 교회를 함께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온유하신 주께서 상을 엎으시기까지, 그들을 내쫓으시기까지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저희는 헤아리지 못합니다. 다만 왜 그러시는지 오해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넘어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가 옛성전과 동일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거룩한 교회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세속화되지 않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사람에게 열린 교회가 되게 하사, 머뭇거리는 이들이 이곳에 와 주님을 뵙게 하여 주옵소서. 이곳에 빈 자리에 낯선 이들이도 오게 하시고, 함께 예배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는 기도
주님, 주님의 삶과 죽음을 새겨보는 사순절 기간,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밤, 기도하기위해 각자의 처소에서 엎드린 이들이 있고 그리고 주님의 뜰에 나와 고개숙인 자들도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혹여나 상처입은 영혼들, 지친 영혼들이 나아왔다면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기도조차 할 수 없어 탄식하는 이들의 호흡마저 우리주님 간구로 들으사 그들을 향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슬라이드1
1. 이 땅의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소서
– 세속화된 교회들이 새롭게 되게 하소서
2. 이 땅의 교회가 만민에게 열리게 하소서
– 연약한 자들을 품게 하소서

슬라이드2
1. 병상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2. 취업 준비생, 군인, 결혼과 자녀를 위하여
3.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 당하는 이들

슬라이드3
1. 원로목사님과 위임목사님, 모든 교역자들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2. 당회원들과 제직들이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3. 겨울성경학교와 수련회를 위해
– 어린이부, 유년부, 청년부

마지막 슬라이드
각자 가져오신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신 후 돌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