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2 아직 남은 일들
행9:36-42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도입
년초에 계획하신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계획들은 잘 이루어 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계획을 하지만 그 계획들을 다 지키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작년의 목표와 계획이 새해의 목표와 계획으로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계획을 세우는 일조차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계획을 세워 주변에 이야기를 하면 어차피 안 지킬 일을 왜 하냐는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계획한 일들이 중요하지 않아서 미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관성이 너무도 강하게 우리를 살던대로 살아가도록 밀어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관성에 밀려 살아가다보면 이전에 놓쳤던 일들이 후회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가정을 살펴보면 엄마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 화가 납니까? 책상 정리하느라 한 세월이고, 책꽂이 정리하는데 또 한 세월입니다. 자리에 앉는가 싶더니 물 마신다고 왔다갔다 합니다. 이제 공부하라고 소리치는데 아이가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폭발하지 않겠습니까? 각각의 행동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책상을 정리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다 시험의 날이 다가오게 되었을때, 아이는 하지 않은 일들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매 순간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욥바입니다. 욥바는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다지 중요한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방인들에게 넘어갈 때도 있고, 다시 정복할 때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욥바가 등장한 장면을 살펴보면,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갈 때 배를 타던 곳이었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사용했던 항구이기도 합니다. 그 외 역사 속에서도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아왔고 켜켜히 쌓인 삶의 흔적들이 그 도시에 잠들어 있었지만,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도 대단하게 여길 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처럼 종교적으로 중요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처럼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도 아닙니다. 그저 이스라엘의 변두리 지역이고, 이방지역이라도 틀린 말이 아닌 곳이었습니다. 대단한 역사가 일어날 곳도 아니었습니다.
인물 소개
그런데 그곳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비다라 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성경은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란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바로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붙여졌던 가장 원초적인 표현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성도, 하나님의 백성 여러 표현들이 있지만 가장 먼저 사용되었던 표현은 바로 제자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며 살아가던 여인을 성경은 여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났습니다. 그 생명의 빛은 사그라들었고, 차갑게 식은 몸뚱이만 남았습니다.
장례를 치룰 준비를 해야하지만, 그러나 다비다를 이렇게 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 다비다를 통해 은혜를 경험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비다를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때가 당장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이 언젠가 나팔 소리에 깨어 일어나 함께 하게 될 것을 믿었겠지만 당장 다비다의 죽음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루며 이 여인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여인들은 베드로를 불러 옵니다. 무슨 믿음이 있어서, 무슨 각오가 있어서 어떤 결과를 기대해서 베드로를 불렀는지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성실하게 걸어왔던 여제자의 마지막 순간, 장례의 절차를 베드로가 치뤄주길 바랬는지 어떤 믿음이 있어서 살아날 것을 구했는지 는 모릅니다.
베드로도 다른 일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간청에 못이겨 욥바로 달려왔습니다.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비다가 그들을 위해 지어준 옷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지금도 옷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마음만 먹으면 옷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겉옷 한 벌 속옷 한 벌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빚을 못갚으면 옷을 가져갈 정도였습니다. 그 한벌이 그 사람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고로이 옷을 만들어 과부들을 섬겼던 다비다였습니다. 그의 선행과 구제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다 기록되지 않지만, 그가 지어준 옷을 가져온 과부들이 오늘 베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속옷까지도 가져와서 이게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이게 다비다 언니가 지어준 옷이에요. 이게 이 옷도 지어주었구요, 이것도 다비다 언니가 지어주었어요.”
그 외에도 다비다와 함께 했던 순간들, 그녀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들, 그 사랑의 수고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이 순간 베드로에게 어떤 믿음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다만 장례가 났다고 해서 달려갔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저마다 지지 않고, 자신이 다비다에게 받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보냅니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그가 하는 작은 행동조차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허례허식이 아니길, 장례를 치루어야 하는 분주한 상갓집이지만, 그 순간만은 주님 앞에만 서길 구하며 사람들을 내어 보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베드로에게 어떤 믿음이 있었는지, 어떻게 이러한 기도를 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다비다를 일으키셨고, 다비다는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장면은 우리가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다비다와 함께 했던 과부들이 다 올라와서 다비다를 붙잡고 울면서, 자기를 알아보겠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비다가 지어주었던 옷을 갖고와 언니 이거 기억나지 하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비다와 과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지 않은 도시에서, 이전에는 이름한번 알려지지 않았던 여제자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고,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비다는
오늘 본문은 그렇게 다비다가 살아나게 되고,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됨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렇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을때 다비다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죽다 살아나게 되었을 때, 다 시 한번 삶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 다비다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 다비다도 왜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살리셨을까 내게 남은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시는 아쉬움이 없도록 그 때 못먹은 맛있는 음식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사람도 만나겠습니까? 소위 죽기전에 해야할 100가지를 적어서 다하면서 살겠습니까? 버킷리스트는 말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나의 만족을 최대로 늘리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채우고 나서 죽겠다는 말을 세련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땅에서 삶이 마무리 되고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때 못간 여행이 아쉽겠습니까? 그때 못먹은 음식이 생각나겠습니까?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름 없는 부자는 이 땅에서 온갖 좋은 것을 누리고 살다가 죽었고, 거지 나사로도 상에 떨어진 것을 개들과 같이 먹다가 죽었습니다.
음부에서 고통받던 부자는 멀리있는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청을 아브라함이 들어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청합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 형제들에게 보내어 증언하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청은 거절당했습니다. 이름없는 부자는 여전히 자기가 부자인양, 거지 나사로 정도는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죽었지만, 자신의 고통을 넘어 자기 형제들에 대한 안타까움 속에 부르짖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던 그 마음이 여전히 있었던 것입니다. 변하지 못한 것입니다.
죽어다 살아난다고 해도 변화되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만 그만큼 희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었다 살아나도, 이전에 살았던 그 삶을 반복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다비다는 어떠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다비다는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요? 아니 우리가 다비다라면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요? 다비다에게 우리에게 할 일이 무엇이 남아있겠습니까? 이 질문을 서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다비다의 삶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고, 이전에 하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면 오늘 본문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죽었다 살아났다니 이렇게 변했다 바뀌었다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베드로가 다비다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아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간증집회를 열며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를 하게 했겠지만 다비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다비다란 이름은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동행하지도, 다른 사역을 했다고 나오지도 않습니다. 왜 그런지는 나사로를 보내달라던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하던 말 속에 답이 있습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다만 추측하기는 다비다는 다시 삶이 주어졌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들과 함께 하며 여전히 선행을 하며 구제를 하며 과부들을 돌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 왔던 일을 계속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일 했을 것입니다.
그 일은 다른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달라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떠한 자격과 조건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가 해왔던 일, 그가 주님의 제자로서 해왔던 그 일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다비다에게 남은 일은 제자로서 살아왔던 삶-구제와 선행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비다를 살려주신 것도 그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수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그렇게 사랑하며 섬기는 일, 그일이 가장 중요하기에 다비다는 그 일을 이어갔을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책망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수많은 사역을 하고, 이단과 맞서고 박해에도 굽히지 않으며 지도력을 펼쳐온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가 감당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놓치고 있던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다시 사랑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사랑없음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준엄한 경고였습니다.
수많은 사역을 하고, 이단을 물리치고, 복음을 전하였지만 그 속에 사랑이 없다면 주님 보시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는 주님의 일을 한다면서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다하면서도 마치 시험기간에 책상만 정리하는 아이처럼, 화장실은 들락날락거리지만 공부하지 않는 아이처럼 주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일을 해서 받게될 심판도 있겠지만,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아서 받게될 심판도 결코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주신 기회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옆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가족도 있고, 구역의 식구도 있고, 직장의 동료일수도 있고, 때로는 내가 친하게 지내는 누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여러 일들이 있고, 지금도 처리해야할 일들이 돌아서면 쌓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선뜻 다가가가는 것이 두렵고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망설일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일은 우리가 TV에 나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선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비록 죽다 살아난 것이 아니지만, 주님께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할 때에 우리는 영생을 미리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헛된 것에 목을 메며, 쓸데없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허비할 때 우리는 지금 이순간 가장 중요한 일을 감당하며 가장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밤이 깊어졌습니다. 오늘 기도회가 끝나고 나면 잠이들겠지만, 오늘 기도에 참여하신 대부분의 분들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시간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아니 기도를 마치고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때, 굽혀있던 무릎을 펴고 다시 일상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에는 가장 중요한 일, 우리 인생에 아직 남은 일들을 충실하게 감당하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주신 삶의 시간들이 언제까지인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관계들이 언제까지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의 끝이 오늘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관계 속에 영원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이 이 땅에서 마지막 날이라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주께서 주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저희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을 누군가 이야기할 때 주님의 제자였다고 하게 하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실장님 오늘 기도제목 드립니다.
슬라이드1
1. 우리에게 주신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
2. 우리에게 주신 삶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3. 주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슬라이드2
1. 병상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2. 수험생과 취업 준비생, 군인, 결혼과 자녀를 위하여
3.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해
슬라이드3
1. 원로목사님과 위임목사님, 모든 교역자들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2. 당회원들과 제직들이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3. 세상을 향하여서 담대하게 사랑을 전하는 교회되도록
마지막 슬라이드
각자 가져오신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신 후 돌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