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8 금요, 살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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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 수 있다면
마가복음3:1-6 막3:1-6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예전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개그콘서트라고 있었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보던 부분은 그중에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코너입니다. 매주 내용은 조금씩 바뀌지만 구성은 비슷합니다. 먼저 테러를 비롯해 비상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상대책위원회가 모입니다. 군과 경찰, 관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회의를 하는데 절차가 너무 복잡합니다. 논의는 진행하지도 못한채 시간이 지나갑니다. 극중에 등장하는 경찰은 무슨 안건이 나와도 “안돼”라고 소리칩니다. 이어 안되는 이유만 늘어놓습니다. 이런 규정에 걸리고, 저런 규칙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마침 대통령이 방문합니다. 대통령이 단번에 해결책을 내놓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대통령이 왔으니 의전행사도 해야하고 국민의례도 해야 합니다. 태권도 시범단도 나오고 마술 공연도 해야 합니다. 식순과 정해진 규칙을 따라가느라 정작 해결하고 했던 비상대책은 내놓을 시간이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였는데, 정작 문제해결은 못하고 파국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렇게 안되고 맙니다.

지나간 시대의 코미디 프로라고 넘어가기에는,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는 문제들을 풀어가기 위해 수많은 조직이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절차를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논리적이고 선진적인 제도를 만들어 놓고는, 그 자체로 만족하며 이제 우리 조직도, 우리 단체도 도약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가 조직이 과연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목적을 상실한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목적을 상실한 채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수단이 절대화되고 그것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웃고 넘어갈 수 있습니까? 그저 비판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까? TV 속에서는 희극이지만, 현실에서는 비극 아니 참혹극이 되어 버립니다. 실은 우리조차도, 수단에 사로잡혀, 본질이 아닌 것에 사로잡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너희는 본질을 붙잡고 있냐고 묻는다면 무엇을 답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이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배경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마가복음 2장과 3장에는 논쟁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그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불화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장과 3장에 5개의 논쟁이 있는데, 예수님의 복음이 그 당대의 관습과 종교와 어떻게 부딪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살피면, 첫번째 논쟁은 중풍병자를 고치면서 나오게 됩니다. 중풍병자에게 죄를 용서하며 논쟁이 시작됩니다. 죄사함의 권세는 누구에게 있는가를 다룹니다. 두번째는 세관에서 일하던 레위를 부르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다룹니다. 세번째는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냐는 말로 시작하여, 시대를 분별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네번째는 제자들이 밀이삭을 자르면서 메시아, 곧 예수님은 누구신지에 대해 논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부딪혔던 지점을 다루는 논쟁이 이어지고 나서, 그리고 마지막 절정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복음과 시대가 불화하는 와중에 가장 결정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본문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면서 시작됩니다.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오셨습니다. 병든자들을 살리시고 고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오셨다면, 너도나도 치유를 바라며 나아갈텐데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전에는 지붕이라도 뚫고 고침받으러 왔는데 오늘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2절에 있습니다. 제가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벌써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 어기게 되면 고발할 생각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함정에 넘어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기서, 예수님께서 못 본척 넘어가면 긴장은 해소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도 율법을 존중하는 것이고, 질서 유지에 큰 해가 없을거라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굳이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셔도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부딪힐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악의에 차있는 감시자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마른 사람은 어떻습니까? 오랜 세월 고통받아온 사람이지만, 내일 고쳐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이 날 때부터 그런지, 중간에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하루가 늦어진다고 해서 대단한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루만 더 기다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다들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약간만 구부리면,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보다 쉽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굳이 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본질은 결코 양보할 수 없습니다. 본질에서 물러서면 조직과 규정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제
2천년 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기는 커녕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뒤를 따를때가 있습니다. 한영혼을 살린다고 하면서도, 이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과 규칙이 한 영혼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은 마치 이런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고 하지만, 과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에 율법을 증거합니다. 복음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신앙의 관습을 가르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일에는 찬성하고, 어떤 일에는 반대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처음에는 그 하나하나가 신앙의 결단이었고, 눈물겨운 삶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게 되면, 그 맥락은 사라져 버리고 죽은 율법만 남게 됩니다. 그렇게 원래의 의도와 목적은 잃어버린 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복잡한 조직과 규정 속에 길을 잃어버리고, 의도한 바는 법 기술자들과 조직에 기생하는 아첨꾼들 손에 무너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당연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체념하며 그대로 받아들여서 안됩니다. 과연 그러한지, 과연 그것이 본질인지 물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4절에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이 질문은 무엇을 묻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왜 잠잠하고 있습니까? 이해 못해서, 답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답이 나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답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선을 행하더라도, 아무리 살리더라도 안식일이란 율법을 어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아니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안식일 자체가 그들에게는 중요한 목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려는 예수라는 사람까지도 말입니다.

처음부터 안식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 끝자락에 들어서면서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조상은 구약시대 내내 말씀을 어겨 포로가 되었습니다. 성전도 무너졌고, 땅도 잃어버렸습니다. 혈통도 불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부심은 있으나 증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안식일로 규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전이 없어도, 약속의 땅을 잃어버렸어도, 안식일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켜야만 유대인으로 여겼고, 안식일을 지키는게 그들이 자부심이 되어버렸습니다.

안식일의 의미
그러나 안식일은 그런 의미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비롯하여 모든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셨고,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샬롬을 누릴 수 있도록 주신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샬롬과 상관없이 율법을 지키냐 안지키냐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을 받고, 포로가 되었던 것은 안식일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고, 이웃들을 압제하여 하나님과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통치자들은 공의와 의를 행하지 않으며 법관들은 타락했고, 지도층은 사치스러웠으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돈을 받고 듣기 좋은 소리만 했습니다. 사람을 신발 한켤레 값에 팔아치며, 끝도 없이 전토와 가옥을 사들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다 망했습니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사람들이 몰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머리로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선물이고, 은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세워온 율법을 흔들며 안식일을 깨뜨리는 자를 견딜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자부심의 근원인 율법 준수를 무너뜨리고 있는 복음에 화가 나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사람들의 등쌀 속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손마른 사람은 말조차도 못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오늘 고치나 내일 고치나 상관없겠지만, 아픈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당장 감기만 걸려도 인생 다 산 것 같은데, 하물며 이러한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고개라도 끄덕일 수 없습니까?

이 사람은 낫고 싶다고, 이제는 회복하고 싶다고, 고쳐달라고 그 말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샬롬을 누리며 은혜 속에 회복되고 싶지만, 저 부라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자들을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께선 그들의 완악함에 탄식하십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노려보고 있는 그들이야 말로 완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계신 주님을 보지도 못한채, 그들 곁에 있는 손 마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채, 율법으로 자부심을 견지하는 자들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여기며, 율법을 준수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여기겠으나,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 막고 있으며,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율법에 대한 이해가 높으나 실은 사단 마귀 노릇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단마귀의 자식인 것은 6절에 드러납니다. 제가 말씀을 읽겠습니다.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논쟁 끝에 바리새인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헤롯당과 합세하여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헤롯당은 본디 바리새인들과는 상극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열성적인 바리새인과 로마 황제를 메시아로 여기는 세속적인 헤롯당이 어떻게 힘을 합치겠습니까? 이들은 원래 서로 원수였습니다. 율법을 지켜 독립하려는 바리새인과 로마에 기댄 헤롯파가 어떻게 손을 잡겠습니까? 이들은 서로 대립적인 것 같지만 실은 한 통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시대의 지지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전에 원수와 같던 자들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이라는 공동의 적을 죽이기 위해 힘을 모으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율법을 지키던 자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을 주도하게 된 것입니다. 평생에 하나님의 법을 연구하고, 해설하고, 지켜왔던 자들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으로 가장 열정적인 자들이야 말로, 가장 율법주의자들이야 말로 죽이는데 앞장 서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침묵으로 동조하며 율법으로 사람을 억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택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살릴 수 있다면, 이 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바리새인의 율법과 부딪힌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십자가에 달린다 할 지라도 부딪혀서 한 사람을 구하십니다.

단 하루라도 지체할 수 없을 만큼 그 한 사람을 살려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그 조직과 규정이 오히려 사람을 얽어매고, 사람을 억압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러한 종교와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한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이러한 것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안돼!가 아니라 돼!인 것입니다. 제 아무리 규정과 조직과 관습과 법률이 있다하더라도 한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면 아니 사람을 살리는 것을 막는다면 그 모든 것은 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인간의 제도일뿐입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마른 손을 보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대 가운데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살려달라고 고쳐달라고 소리치지도 못한채 그저 멀뚱히 서있는 손 마른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손을 내밀라…
내 손을 내밀라…
내 손을 내밀라…

이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가로막힌다 할지라도,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이 합세하여 달려든다 할지라도, 지금 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바리새인의 제자입니까? 이 대답은 저와 여러분을 위험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조금 편안한하고 별 탈없이 살고자 침묵하며 내 손에 피가 묻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저와 여러분은 살리는 쪽을 택해야 합니다. 살릴수 있다면,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소리쳐야 할 것입니다. 내 손을 내밀라고, 그래도 된다고, 안돼가 아니라 돼!라고 소리쳐 한 사람을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주님
주께서 침묵을 깨시기 까지 비겁한 자들은 숨죽여 있었고, 율법주의자들은 눈을 부라리고 있었습니다. 손 마른 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 손을 내밀게 하여 주옵소서.
손 마른 자들이 손을 내밀게 하여 주옵소서.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머뭇거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그 침묵을 깨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소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슬라이드1
1.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본질을 붙잡게 하소서
2. 율법을 넘어서는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슬라이드2
1. 이 시대의 손 마른 자들을 위하여
– 장애, 가난, 탈북, 외국인 노동자들
2.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슬라이드3
1. 산성교회가 버려진 자들에게 손 내미는 교회가 되기를
2. 수험생과 취업 준비생, 군인, 결혼과 자녀를 위하여
3. 병상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마지막 슬라이드
각자 가져오신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신 후 돌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