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한 요구 민27:1-7
기도 8:40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금요기도회로 8개월만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흩어져있는 동안, 함께 함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제한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고자 합니다.
주님 오늘 이 예배를 주님께서 받아주시옵소서. 이제부터 시작되는 금요기도회를 통해,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닫혀진 입술을 열어주시고, 담대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소서.
자격없는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의롭다 말씀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한걸음 나아가오니 주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육신의 연약한 자들과, 원통함이 있는 자들과 괴로움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선한 것을 주시는 주님을 보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인사
2월 달에 금요기도회를 드리고, 8개월만에 드리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되어 모이기 어렵지만 기도에 힘쓰고자 하는 분들이 있어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직 제한된 상황이지만 현장에 나오신 분들과 온라인으로 참여하고 계신 모든 분들에께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길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민수기 27장 1절에서7절까지 말씀입니다.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본문)
1 요셉의 아들 므낫세 종족들에게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찾아왔으니 그의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2 그들이 회막 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휘관들과 온 회중 앞에 서서 이르되
3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5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7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도입: 구경 미션
지금은 여행을 다니기 어렵지만, 여행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예전부터 한국 사람은 구경을 좋아했습니다. 120년 전 선교사들이 조선에 왔을 때,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서양 문물이 있는 사택는 그 자체로 볼거리었습니다. 선교사의 사택을 양관이라고 했는데, 워낙 사람들이 신기해 하고 구경하러 오니깐, 선교사들이 사택을 개방하고 손님들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서양 사람을 보는 것도 신기한데, 그 사람들 집을 구경할 수 있다니 상당한 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경하는 줄을 설만큼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선교사들과 대화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선교사들을 집을 공개하는 일을 구경미션이라고도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외 주요 관광지에 가면 한국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구경하러 많이들 다녔습니다. 여기서 주요 관광지라는게 포인트입니다. 잘 알려진 곳, 유명한 곳에 가서 사진만 찍고 또 급하게 다음 포인트로 갑니다. 다들 어느 여행책에 나온 곳, TV에 소개한 집, 블로그에 나온 유명 맛집에 가고나면 다음 도시로 넘어갑니다. 아니 국경을 넘기도 합니다. 며칠 안되는 일정에도 유럽 몇 개국을 다녀왔다고 자랑을 합니다. 가성비가 뛰어난 여행이긴 합니다. 아쉬움이 있습니다.
내려서 잠깐 사진만 찍고 가면 정작 그 장소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놓치기 쉽습니다. 겉핥기로 본들, 피상적일뿐입니다. 구경만 잘하고 온 것입니다. 나는 거기 가봤다고 할 수 있지만, 정작 남은 것은 사진 몇 장 밖에 없습니다. 그저 사진으로 남은 기억의 조각들로 끝나게 됩니다. 여행을 다녀왔지만, 사진 몇장과 함께 이미 갖고 있던 이미지만 더 선명해집니다.
그러나 제대로 현지를 경험하려면 그렇게 해선 안됩니다. 속도를 낮추고, 관광객이 적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큰길이 아니는 좁은 길로 가야합니다. 관광지의 큰 쇼핑센터가 아니라, 소박한 건물들이 있는 마을에 가야합니다. 그곳의 사람들과 만나며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여행 책자에는 없지만 그 나라, 그 도시가, 그 문화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5:40)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자주 읽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이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큰 물줄기와 같은 부분들이기 때문에 자주 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익숙하다보니, 신앙적인 결단이나 성찰을 못하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잘 알려지고 유명한 본문이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부분도 아닙니다. 등장 인물도 모세를 제외하면 익숙한 이름이 아닙니다. 모세도 주인공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관광지에 비유하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유명한 관광지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그 나라를 잘 알 수 있는 특색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명한 본문은 아니지만 기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특별한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조금은 낯설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되길 소망합니다. (6:53)
본문의 소개1: 등장 인물
오늘 본문을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속도를 내려야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1절은 여러 이름이 나옵니다. 짧은 족보가 나옵니다. 요셉의 아들 므낫세, 므낫세의 아들 마길, 마길의 아들 길르앗, 길르앗의 아들 헤벨,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슬로브핫 여기에서 끊어집니다. 계속 아들이 소개되다가 슬로브핫의 아들 아무개 아니라, 그의 다섯 딸들이 찾아왔다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시작합니다. 족보가 이어지지 않았다, 끊어졌다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요즘에야 아들보다 딸이 더 인기 있는 시대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를 잇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딸이 다섯 명이란 것도 눈 여겨 봐야 합니다. 아마 아들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결과입니다. 2년에 한 명 씩을 낳아도 5명이면 10년입니다. 5 자매를 낳기까지 그들의 어머니도 척박한 광야생활에 최소 5년에서 10년은 항상 임신 중이거나 젖먹이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식을 낳아야 할만큼, 어떻게든 아들을 얻고자 하는 집념이 다섯이란 숫자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집들은 이름에도 아들을 얻겠다는 의지가 담깁니다. 딸은 이제 마지막이란 뜻으로 말숙이라 짓기도 하고, 다음에는 아들을 얻겠다고 또 우자를 써서 우남이라고 짓거나 후남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귀한 남자를 얻겠다고, 딸 이름을 귀남이라고 짓기도 합니다. 이 이름들은 제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에 비하면 영자, 경자 이런 이름은 예쁜 이름입니다. 그래서 오늘 1절을 읽을 때, 그의 딸들의 이름을 우리 식으로 고쳐 읽어보면, 그의 딸들의 이름은 말숙이와 귀남이, 종말이, 우남, 후남이라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슬로브핫은 아들을 얻었습니까? 결국엔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 대가 끊어졌다, 더 이상 이름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한 정도가 아닙니다. 저주로 봐야합니다. 아마 주변 사람들이 이 가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딸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기에 이렇게 회중들 앞에, 모세 앞에 나온 걸지도 모릅니다.
저 집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들도 하나 없어, 딸만 다섯이라면서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습니다. 다섯 딸들이 나오는데, 딸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안나옵니다. 오히려 앞으로 결혼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 말해 미혼입니다. 첫째도 아직 결혼을 안했다면, 나머지도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재수없는 집안이란 오명에 시집을 못간 것 일수도 있습니다. 아직 시집도 안간 다섯 딸들이 지금 모세 앞에, 회중들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3절에 그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 가족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였다- 즉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힙니다. 아버지에 대한 혐의를 풀고자 합니다. 누구나 자기 죄로 죽습니다. 완벽한 도덕군자였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없다고 해서 아버지의 이름이 영원히 지워지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돌아가신 분이 아닙니다. 남들이 손가락질 할만큼 우리 아버지가 잘못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서 있는 딸들도, 죄인의 딸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를 일찍 여읜 딸들임을 밝힙니다.
그들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4절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다른 가문과 지파들이 다 받는 것처럼, 비록 우리가문이 아들이 없더라도 기업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땅들 달라는 요구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요구입니다. 한편으로 죄인취급받지 않겠다는 요구입니다.
이스라엘이 땅분배를 하는 과정에서, 땅 배분은 족보를 중심으로 가문별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대가 끊어졌다는 이유로 땅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이 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들 머물 곳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가나안인들, 복락을 누리는 곳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먹고 살게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먹고살 것도 없고 죄인취급을 받으며 살 수 없습니다. 13:40
거대 담론에 주목하는 세상, 무관심함
여기까지만 보면, 사실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정치를 하고, 군대를 이끌고, 정복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 또는 가문의 족장과 지휘관들이 볼 때에 이들의 호소는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상속문제, 재산문제야 없는 집안은 없습니다. 그저 이런 저런 땅 분배과정의 잡음으로 여기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의 죽음에 무슨 동정할 것이 있겠냐며 자기 죄로 저주받아 죽었는데 무슨 소리를 할 것이냐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집안 문제에는 관심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오늘의 문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불행한 일을 당합니다.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몹쓸 병에 걸려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쉽게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은 저 사람의 죄때문에, 저 가족의 죄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쳐서 억울함을 토로해도 그저 못들은 척하고 지나갑니다.
아픈 일은 당사자에게는 천지가 흔들리는 일이지만, 남들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입니다. 갑작스러운 불행도 당사자와 가족은 감당키 어렵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안됐네 한 마디로 지나갈 일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소식은 누가 권력을 잡고, 누가 어느 자리에 가는 가입니다. 어쩌면 나와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중앙의 권력자들의 암투가 흥미진진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내가 속한 조직에 누가 어느 자리에 가느냐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의 억울한 일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아니 누군가 큰 목소리를 내며, 억울함을 토로하면 화를 냅니다.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며, 질서를 해쳤다며 큰 목소리에 억울한 자들을 눌러버립니다. 그 내용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억울함을 참지 못해서 일어날 때, 사람들은 그 공감하기보다 정해진 질서가 흔들렸다고 분노합니다. 나의 평온한 일상에 조금만 불편을 끼쳐도, 그들의 억울함보다 더 큰 분노로 눌러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회막문 앞에서 회중과 지휘관 앞에 서서 호소하는 슬로브핫의 딸들을 보면서, 어디 여자가 시끄럽게 나대나,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나서냐, 왜 문제를 만들어서 소란스럽게 하냐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은채 그저 끌려 내려갈 수도 있었습니다. (17:40)
본문의 복음
옳다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오늘 본문의 은혜가 7절에 나타납니다. 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하나님께서 딸들의 말이 옳다 하십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의 말이 옳다. 그들에게 기업을 주라 말씀하십니다.
아무 기업도 받지 못한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 수 밖에 없던 이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서 당연히 받을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질 이들에게 주님은 딸들의 호소가 옳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없는 다섯 딸들, 결혼도 하지 않은 나이 어린 딸들의 호소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옳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어디 감히 족장도 아닌데, 앞에 나서냐 타박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자도 아닌데, 왜 나서서 말하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고 주님께서는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의 호소에 응답하셨습니다.
이러한 응답은 그들이 죄인의 딸로 살아갈 이유가 없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개숙이며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잘 모르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저주로 여기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있겠으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딸들이 말이 옳다고 하셨기에 고개숙일 일이 없어졌습니다. 이들에 하나님은 옳다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땅을 주시는 하나님
단순히 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대로 그들이 땅을 분배 받도록 하십니다. 그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주님께서 채워주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먹고 살 수 있도록 땅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이름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은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시 1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름들,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 여기 나오는 이름들을 다시 봐야 합니다. 후남이 귀남이, 말숙이 이런 이름으로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땅을 분배하는 중요한 법이 이들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도록 하여 이들의 목소리와 이름을 남기게 하셨습니다.
다른 율법의 말씀들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셨다면, 본문 뒷부분에 나오는 지침은 딸들의 호소 때문에 허락해 주신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을 분배하는 중요한 문제를 딸들의 호소를 듣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사례로 새로운 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들은 사라처럼 민족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이들은 드보라처럼 사사로서 싸운 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은 다른 업적을 남김지도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이들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기고 이들의 말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이름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 본문이 중요한 본문일까요? 안중요한 분문일까요? 유명한 본문은 아니지만, 약한 자들을 향하여서 옳다하시는 하나님, 이들에게 기업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신 하나님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억해야할 것을 말씀하는 본문인 것입니다. 중요한 본문입니다. 22:05
적용
오늘 본문이 기록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들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또는 솔로몬처럼 살지 않습니다. 소설같은 인생을 살며, 영웅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씨름하고, 대단한 일들을 해내는 사람도 간혹있겠지만 우리의 삶은 그리 대단치 않습니다. 소박하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영웅들의 기도보다 평범한 이들의 기도가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믿음의 영웅들에 비하면 슬로브핫의 딸들은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업적을 남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의로운 사람도 아니었고, 탁월한 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와줄 사람도 없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는 상황에 처해서 결혼도 안한 다섯 자매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셨습니다.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주님께 오늘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다섯 딸들처럼 주님께 구하는 자들에게 네가 옳다 말씀하실 주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다시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에게 어디에 설 것인지 묻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서있는 그곳인지 아니면, 구경하는 자리인지 묻습니다. 딸들을 둘러싼 회중 중에 억울한 일 당한 자들, 괴로움이 있는 이들이 없었겠습니까? 사람 사는 곳에 늘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저 속으로 삭이며 그렇게 넘어갈 때에 하나님께 담대하게 요구한 자들을 응답을 받았고,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은 자들은 기억되지도 않았고, 그들의 어려움이 해결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께 나아가 응답을 받았지만, 누군가는 구경꾼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구경꾼의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들은 가십거리로, 그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 나의 목소리로 올려드릴 때에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목소리를 내시기 바랍니다. 구경꾼의 자리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목소리를 낼 때, 담대하게 요구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선교사들의 집에 구경하러 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저 구경만 했던 사람들은 달라진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 대화를 나누고 목소리를 내던 자들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요구하라, 오늘 본문의 하나님은 딸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의 목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저 구경꾼으로, 그저 회중의 한 사람으로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름으로 남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소리 내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옳다고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시간 우리를 옳다하시고 응답하시며 우리의 기억하실 주님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6:38)
주님
이 시간, 이런저런 이유로 손가락질 받으며 고개 숙이며 다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버려진 자들, 주님게 버려졌다는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만 주님,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옳다하실 주님게 이시간 나아갑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오늘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시간 딸들과 같이 소리내어 주님 앞에 올려드리니 주님 응답하여 주옵소서. 옳다하시는 응답을 듣고 돌아가는 이밤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1 (임재)
슬라이드1 (주신 말씀을 바탕으로)
1.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서도록
2. 절망적인 상황에도 주님을 바라보도록
슬라이드2 (이웃을 향한 중보)
1.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경제적, 건강, 관계 등)
2. 모세와 같은 중보자적 사역을 위하여
찬양2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슬라이드3 (코로나)
1. 코로나가 종식되며 일상의 회복되도록
2. 방역에 애쓰는 이들과 의료진을 위하여
슬라이드4 (교회)
1. 예배 회복을 위해
2. 교역자들과 당회원, 제직과 온 성도들을 위해
3. 환우들을 위해
찬양3 (마라나타 마라나타)
슬라이드5
계속해서 각자의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신 후 자유롭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