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9 찬양예배, 은혜의 증거 (욥4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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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증거 (욥42:12-15)
(3:15~50, 35분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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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월이 되었습니다. 2020년이 시작한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여러 모임들도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신년에 세웠던 계획을 잘 실천하고 계십니까? 그 계획을 꾸준히 실천하고 계신 분도 계실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마도 전과 다른 삶의 정황속에서 계획을 바꾸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계획이 운동이 되었든,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이 되었든 어떤 것이든지 계획을 세우셨다면 변화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결국에는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성공하였는지, 실패하였는지는 언젠가는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계획을 세웠다면, 그 결과가 증거로 전체를 판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시점에서 신앙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음은 계속 자라가고 있습니까? 작년에 비해 올해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성장하고 있습니까? 신앙성장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여러분들께서는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으십니까? 은혜를 받으셨다면, 작년에 비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은혜라는 것이 소위 잠깐 감동받는 것을 뜻하는게 아니라면, 우리 영혼과 인생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면 무언가 증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질문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장해 나간다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드러나는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은혜의 증거입니까?

전환
이를 알려면 누구보다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을 보면 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 하나님을 눈으로 본 사람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요. 누구입니까? 바로 욥입니다.

시기를 알 수 없는 고대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살던 곳도 이스라엘과는 떨어진 곳이었고 정확하게 그곳이 어딘지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살아온 정황을 살펴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저 문학적인 인물로 욥을 제시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그에 대한 설명은 무엇입니까? 욥기 1장에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자라고 설명합니다. 이보다 신앙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양과 낙타 소와 나귀가 만 마리가 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지만 가난한 자들을 못본척 하지 않았습니다. 빈궁한 자들의 요청에 응답했던 사람입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한 도덕성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그럼 사람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아들 딸도 넉넉하게 있었고,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이미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당대의 기준으로보면 그는 이미 은혜를 받은 자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더라도, 복받았다는 소리가 나올만 합니다.

그런 욥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인생의 정점에 있던 욥은 갑작스럽게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의 가정도, 그의 사업도, 그의 건강도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을 한 순간에 잃었고, 그의 아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재산이 먼지처럼 사라졌고, 그 자신도 병중에 고통받으며 태어난 날을 저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가 바로 욥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욥이 하나님을 뵙게 되고, 다시 회복되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 일을 경험하고 욥은 고백합니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모세도 평생에 주님을 섬겼지만, 주님의 영광을 직접 눈으로 뵙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그의 인생의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그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중에 하나님을 대면하신 분이 계십니까? 비유적인 뜻이 아니라 정말 눈으로 뵌 분이 있습니까? 이처럼 욥은 대단한 체험을 하게 된 것이지요.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욥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욥이 받은 은혜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욥의 삶은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만약 여기서 달라진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신앙성장이란 말도 더 이상 쓰기 어려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다면, 무언가 달라진 것이 없다면 어떻게 성장했다고 말하겠습니까? 아이가 자라는 것은 정확하게 키를 잴 수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학생의 실력이 느는 것은 점수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실 믿음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측정 가능하고, 통제 가능해야 무언가 조건을 변경해 가며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텐데, 우리의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보니, 그럴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믿음을 직접적으로 측정할 방법이 있는가 할 때, 사실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신앙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정작 측정할 수 없으면 내 믿음이 자랐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성장이란 말 자체도 우스운 말이 되어버립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삶에 대해
그런데 한 개인이 겪을 수 있는 고난 이상의 고난을 겪었던 욥,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절대적인 고난을 견디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단판지었던 욥마저 그 변화를 찾을 수 없다면, 은혜의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너무도 절망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도, 하나님을 뵈어도 별 수 없구나 이러한 체념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체념에 사로잡혀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시도나 변화에 대해서 그거 옛날에 다 해봤어, 나도 다 안다는 말이 실은 체념의 다른 말입니다. 나도 수련회 가봤고, 훈련도 받을 만큼 받아봤다고 생각하는데도 변화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성장했다는 것입니까? 성장 안했다는 것입니까? 성장의 여부는 놔두고서라도 은혜받았다는 증거조차 잃어버린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런 기대도 없이,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저 내 인생에 크게 변화될 것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실천적인 무신론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든 안계시든, 내 인생과 상관없이 평온하게만 지내만 그만이란 태도로 산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사실은 불신앙을 자신의 경험으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라든지, 부자 나사로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내 인생에 다른 어떤 변화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저 지금의 삶의 조건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인생, 그런 인생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욥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오늘 본문은 고난을 견디고, 주님을 뵈었던 욥의 삶을 간략하게 스케치합니다. 고난을 견디고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를 다룹니다. 첫 번째로, 12절에는 그의 재산이 회복되었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회복을 넘어 갑절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욥기 1장에 나오는 그의 재산의 두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욥의 달라진 모습입니까? 부자였다가 다시 부자로 돌아간 것아닙니까? 원래 부자였는데, 다시 부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재산은 두배로 늘었지만, 그의 고난과 그의 신앙 성장의 결과로 여기기에는 어려워보입니다. 욥이 고난을 겪은 후에 재산을 늘리는 비법을 익혔다고 봐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더 주신 것이지, 욥이 변화되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은혜의 증거로 볼 수 있는가는 조심스럽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13절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이 등장합니다. 욥기 1장에도 동일하게 아들 일곱에 딸 셋이었습니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가 다른 자식을 낳는다고 해서 그 자식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심방을 다니면, 이미 자녀 손자들을 보았지만 일찍 보낸 자식에 대한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자녀들 눈치보아 이야기하지도 못하지만, 늘 가슴에는 시린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자식들은 회복의 의미이긴 하나, 이것이 욥이 신앙적으로 성장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기에 은혜라 할 수 있지만, 욥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았을까요? 바로 14절과 15절입니다. 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들의 특징을 나열하고, 그들에게 기업을 물려준 것입니다. 앞의 두가지가 욥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이것은 욥이 한 것이지요. 순전히 욥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정은 이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욥이 고난받기 전 후는 동일한데,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욥이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달라진 것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딸에 대한 태도입니다. 욥은 은혜를 받아서 딸에게 잘했다. 딸한테 잘하는 것이 은혜의 증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앙 성장을 확인하려면 딸한테 잘하십니까? 물어보시면 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까? 딸에게 잘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옆사람에게 이렇게 인사해보시겠습니다. 딸에게 잘합시다.

이렇게 마치면 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딸이 없습니다. 그 이유도 있지만 조금더 나아가야 본문의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딸에게 잘한다는 것
딸에게 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욥의 시대를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없으나, 고대에 딸은 그저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여기 계신 분들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딸이라서 온갖 천대 받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저 어차피 시집갈 걸 뭐하러 공부시키느냐 이런 소리 들어보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고대에는 어떤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야곱도 결혼할 때, 그 외삼촌 라반이 딸을 재산 증식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딸을 주면 주었지, 사위한테 7년간 노동을 해서 데려가라고 하면 그게 결혼입니까? 매매혼일 뿐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당시에 사람들의 경향과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사실 이름을 기록에 남길 거면,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하는데, 딸의 이름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재산은 아들한테만 물려주면 되는데 딸들에게도 물려주었습니다. 이것이 겉으로 나타난 변화입니다. 욥은 그 시대의 관념에 사로잡혀서, 그저 아들 아들 했던 것이 아니라 더욱 넉넉한 마음으로 딸들에 대해서도 은혜를 베풀며, 더욱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이름만 기록해도 되는데, 아들에게만 물려주어도 되는데 딸의 이름을 기록하고 딸에게 재산을 주었다는 것은 그가 관대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를 받았기에 더욱 관대해졌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기준의 위험성
이점은 매우 중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을 평가할 때 이 부분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신앙을 판단할 때 어떤 기준을 내세웁니까? 물론 열길물 물속보다 깊은 한길 사람 속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새벽예배를 잘 지키는지, 주일 성수를 잘하는지, 또는 얼마나 십일조 생활을 잘하는지 이런 것들을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도 신앙의 성장을 판단할 때 외적인 기준에 충족하는지에 몰두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결국 초점이 자신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내가 그 기준을 지켰는지, 안지켰는지에 관심이 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이 틀을 잡기 위해 그러한 기준을 세우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만, 그러한 외적인 기준으로는 자기 자신이 정한 기준을 지키는 것으로는 결국 바리새인의 기준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면, 남들도 이걸 지켰나 안지켰나만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켰으면, 믿음이 좋고 안 지키면 믿음이 나쁜 것으로 이분법적인 사고로 판단하게 됩니다.

더욱이 신앙적 각오가 대단할수록, 자신에게 엄격할수록 남들에게도 더욱 높은 기준과 엄격함으로 판단하며 재단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 그런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쉽게 판단하지만, 그 사람들은 스스로 높은 기준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준이 은혜의 증거로 율법의 조문을 드는 순간 그들은 율법주의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신앙과 상관없는 몇가지 규칙을 지킨 완고한 자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지켰냐 안지켰냐 죄냐 아니냐 이것에 눈에 불을 키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어쩌면 욥의 이전 모습이 이런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욥이 고난받기 전 모습을 살펴보면 변화된 모습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욥기 1장 5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욥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이 자녀들을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들이 죄를 지었나 안지었나를 보았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의 기준은 높았습니다. 훌륭한 신앙인이고, 높은 윤리 수준을 지켜왔던 욥인 만큼 그러한 기존으로 자식들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다른 사람들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경험하고, 은혜를 경험한 욥은 자녀들이 죄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하나 하나를 보게 됩니다. 당대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딸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들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전에는 죄가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전에는 뭉뚱그려 자녀들이었다면 이제는 한 명 한명의 이름으로 그에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에게 있어서 은혜의 증거였습니다. 그의 재산도, 그의 건강도, 그의 사회적 위신와 위치는 은혜의 증거라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변화된 관점. 자녀들 특히 딸들을 향한 태도에서 그가 은혜를 받은 자임이 드러난 것이지요. 그는 결코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겪고 다시 서게된 그 자리는 그저 이전에 있었던 같은 자리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외적인 기준을 이야기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억울해 할말큼 그들의 죄에 대해서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다만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해서 연약하고 실족할 수 있는 이들, 어린 아이나 미숙한 자들에 대해서는 아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그분께서는 좌편과 우편을 나누시고 말씀하십니다.

마25:45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위해 더 높은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받았기에 더욱 관대해진다면, 은혜를 받았기에 더욱 너그러워진다면, 은혜를 받았기에 연약한 자들에 대해서 더 돌아보게 된다면, 우리는 은혜의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딸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저도 없습니다. 올 한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은혜의 증거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