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를 노래
찬송가 447, 계14:1-5
도입: 모든 찬양대의 꿈
찬양대의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줄 믿습니다.
모든 찬양대원들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떤 꿈이겠습니까? 우리 찬양대가 예술의 전당에 서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종문화회관일까요? 우리 찬양대가 정성껏 찬양을 준비해서 그런 자리에 선다면 그것도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전문 음악인이 아닌이상 평생 자랑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자리가 있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찬양대로 시온산 위에 서는 일일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새노래를 부르는 것 아마 모든 찬양대원들이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아니 찬양대뿐만 아니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의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서서 하나도 빠진 사람없이 서로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며 승리하신 어린 양을 찬양하기 원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 때문인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역사 속에서 많은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본문을 택하는 것이 조심스러웠습니다. 간절한 소망만큼 어그러진 방향으로 달려간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읽다가 넘어진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읽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 다시오신 그날에 묻성도들이 함께 찬양한다면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하다못해 산성의 여러 찬양대원들이 함께 찬양한 것만 하더라도 대단한데, 14만4천명이면 얼마나 웅장하겠습니까? 예전 2002년 월드컵 응원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면 절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런 자리라면 어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이라도 선망하며 제발 거기에 서기를 바랄 것입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인기를 가졌다할지라도 아무리 대단한 공연이라 할지라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광경에 비길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 제기: 우리의 찬양대
그렇다면 여러분의 찬양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처럼 주님을 찬양할 때 영광을 경험하십니까? 주님의 은혜를 찬양할때 기쁨이, 십자가를 노래할 때는 죄사함의 은총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물론 매번은 아니라도 그러한 은혜를 누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아마 찬양대를 섬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대부분의 시간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연습하면서 피로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함께 할 대원들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어려운 찬양을 하면 짜증이 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찬양대로 서고 있는 나 자신조차도 주님의 크심을 드높이는 찬양의 가사와 달리 이런 저런 삶의 고단한 속에서 초라해지고, 때로는 내려놓고 싶을 마음이 들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록 우리 현실의 척박함이 오히려 더욱 크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나 자신이 마치 위선자이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게 맞는 걸까요? 오늘 본문을 읽을 때 주님의 영광을 보신 분도 계시고, 우리의 비루함과 초라함을 느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두분 다 본문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과 뒤에서 두 가지를 다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십사만사천
먼저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살펴보아야 할 단어는 십사만 사천입니다. 시온산 위에서 어린 양과 함께 한 십사만 사천은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들일까요?
역사적으로 여기 나오는 십사만 사천을 특정한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근래에 이단들이 자기들 무리가 십사만 사천이라고 주장했는데, 말도 안되는 주장입니다. 자기들이 십사만이 넘어서니깐 슬그머니 침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사람들도 있고, 순교를 당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의 의미를 보려면 계시록 7장을 봐야 합니다. 계시록 7장 4절에 보면,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사천이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지파의 구분이 사라질 때였습니다. 이미 구약시대에 바벨론 포로기를 겪고난 후에는 다른 지파들이 남아나질 않았고, 대체로 유대인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없는 지파들을 만들어서 구원하시는 말씀일까요? 그러나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 초대교회는 자신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대응하는 신약의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가 신약에서는 열두 사도로 대변되는 교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무리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결국 성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십사만사천은 무슨 특별한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산성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주님을 기다린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에서 속량받은 자들, 바로 우리가 십사만 사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사만사천에 대해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하면, 갸우뚱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 4절과 5절에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보통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4절과 5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3절까지만 보면 십사만사천이 구원받은 자를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4절과 5절을 보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 말대로라면 평생 동정을 지킨 사람, 흠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어야만 그 무리에 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동정으로 사는 사람이 결혼한 사람보다 더 거룩한 사람입니까? 성적인 욕망 외에도 우리가 다스려야할 욕망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만으로 거룩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이 말씀을 이해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게 홀로 살아갔던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음녀 또는 유혹하는 자로 등장하는 이 세상과 짝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잠언에 나타나는 음녀처럼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 세상을 가리켜 요한계시록은 여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과 짝하지 않고, 어린 양을 따라간 사람이 이러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시대는 박해받는 시기였습니다. 아무나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300년동안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당국의 프락치인지 아닌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몇년이 지나야만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걸고 결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십사만 사천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일반적인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리며,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포기하고서 아니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린 양을 따르기로 한 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성도들이었습니다.
2. 새 노래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단어는 새노래입니다. 과연 이 노래는 어떤 노래일까요? 아무나 부를 수 없는 이러한 새노래는 과연 어떤 노래일까요? 아마 여기계신 분들도 찬송가가 바뀌고 나서 한동안 새찬송가를 부르기가 어색하셨을 것입니다. 익숙한 노래가 아니라 새노래는 늘 부르기가 힘듭니다. 때로는 내가 잘 모르는 찬양이 나오면, 짜증이 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왜 이런 찬양을 골랐나 화가 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 나오는 찬양은 그저 문자적으로 새로운 찬양, 새로운 노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노래는 구약에도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새노래는 원수를 이기신 하나님, 그분의 승리를 찬양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새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고 하면, 단순히 새로운 멜로디와 새로운 리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새노래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어린 양의 승리를 송축하는 노래가 바로 새노래라는 것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그분이 승리하셨다는 노래 바로 그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그 승리의 노래, 어린양이 승리한다는 그 노래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새노래가 아니라 옛노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옛노래는 무엇이겠습니까? 어린 양의 노래가 아니라 바로 짐승의 노래입니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짐승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 짐승은 이 땅의 권세자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시기적으로 로마제국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로마는 자신을 늑대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마는 그 시작에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버려져 늑대의 먹고 자란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있었습니다.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를 세웠고, 그 도시가 로마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처음부터 로마는 자신들의 힘과 권세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며, 세계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기력하게 죽어간 어린양,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힘과 권세로, 칼와 창으로 세계를 정복한 황제야말로 신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를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노래이고, 세상의 노래이고 짐승의 노래이며, 옛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노래를 두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요. 로마라는 그 시대의 지배자들이 부르는 늑대의 노래, 짐승의 노래, 바로 힘과 권세를 숭배하는 옛 노래를 부를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손에 말없이 죽어간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부르게 만듭니다. 돈의 위엄과 권세를 찬양하게 하고,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게 만들며,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며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과시하게 만듭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음악들이 그저 인간의 욕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래들을 아무리 멜로디가 바뀌어도 리듬이 달라져도 옛노래일 뿐입니다.
자신의 힘과 권세를 믿고 살아가는 자들은 옛노래를 부르지만, 어린 양의 승리를 믿으며 살아가는 자들은 새노래를 부르며 나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노래를 부르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힘과 권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시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무기력하게 죽어간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어린 양의 노래, 새 노래를 부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머리 좋은 사람들은 잽싸게 믿음을 저버렸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주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이 믿음, 자신의 재산을 잃을 수도 있으며 사회적 지위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를 잃어버리게 되는 이 노래를 누가 감히 부르겠습니까?
그러나 그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칼에 무기력하게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 어린 자녀들이 잃어가면서도 믿음을 지켜야만 했던 그 사람들 그럼에도 맞서서 싸우지도 않은채, 그들이 믿고 따르던 어린 양처럼 죽음을 맞이했던 자들이야 말로 오늘 본문의 십사만 사천이고, 새 노래를 불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양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온산 위에서 벌어지는 환상과 달리 현실에서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누군가에게 잡혀갈까봐 조심스럽게 부르던 노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하면서 느끼는 괴리감이야 말로, 오늘 본문의 환상을 보았던 세례 요한의 괴리감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그 시대에 박해를 받으며 살아갔던 성도들의 느낌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의 영광스러움과 현실의 괴로움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계시록이 쓰여지던 그 시대에도 동일했던 문제라는 것입니다.
3. 괴리의 해결: 현재와 미래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저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고, 우리와 상관없는 일일까요? 그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허락한 정신승리일까요?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미래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오늘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현실에 대한 묘사로 오늘 본문은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공간은 문자적으로는 시온산이지만,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는 사도요한의 발이 딛고 있는 곳은 바로 밧모섬이었습니다. 척박한 돌섬이고, 물이 없기 때문에 우기에 물을 받아다가 여름에 주님과 함께 갈릴리 호숫가를를 걸었던 요한 사도에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돌밖에 없던 이곳은 괴로운 곳이었습니다. 이미 그와 함께 했던 믿음의 형제자매들, 갈릴리에서 함께 젊은 날을 보냈던 자들은 이미다 주님 곁으로 갔을 것이고, 그가 사랑으로 길러낸 자들도 박해로 인하여서 죽임당하거나 체포당하였거나 어딘가 숨어지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이상 사역을 할 수도 없고, 죽을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 로마군인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요한에게 주님께서는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의 딛고 있는 땅의 현실은 척박했지만, 그들의 눈이 향하고 있는 영적인 현실은 영광스러웠습니다. 비록 그들은 세속적인 현실에서는 온전한 자들이 아니었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흠없는 첫열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찬양은 현실에서 작은 읖조림이고, 고통의 신음이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크게 울려퍼지는 많은 물소리와 같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깃들기에는 우리의 삶은, 우리의 자리는 너무도 어느 구석진 곳에 편벽하며, 빈궁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고백은 너무 작은 소리라 입안에서 우물거리는 소리로 들릴지 모릅니다. 우리의 병든 몸과 어려워진 생활이 초라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 찬양대가 사람도 몇 명이 없어 소리도 잘 나지 않고, 때로는 부족한 모습에 부끄럽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새 노래로 들어주십니다.
예화
1970년 미국 디트로이트에 로드리게스라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노동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많은 기대를 받으며 첫음반을 냈습니다. 당대 유명 프로듀서가 제작했는데, 단 6장만 팔렸습니다. 3-4장은 가족이 샀다고 치면, 1,2장이 제대로 팔린 것입니다. 그렇게 잊혀진 가수가 되었고, 다시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그러다 30여년이 지나고 로드리게즈에게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남아공에서 로드리게즈를 찾아온 것입니다. 남아공이 흑백차별정책으로 고립되어 있을 때, 그의 앨범이 흘러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로드리게즈가 누군지 몰랐지만, 그의 노래가 암울한 시대에 위로가 되었고 그 시대의 주제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누군지 그의 노랫말 속의 힌트를 찾아 온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30년만에 로드리게즈가 알려지게 되었고, 로드리게즈는 남아공으로 건너가 콘서트를 열매 다시금 가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다룬 다큐영화 제목이 바로 서칭포 슈가맨이었습니다. 옛 가수를 찾는 TV프로 이름이 슈가맨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라고, 그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디트로이트의 어느 빈민가에서 홀로 불렀지만, 같은 시점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부르며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초라한 현실과 화려한 공연장이 공존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남아공에서 콘서트를 하며 가수로서 다시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은 밧모섬과 같아서, 아니 어느 카타콤의 구석와 같아서 어둡고 삭막하고, 황량하며 어느 하나 기댈 곳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앞서 가신 어린 양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주님게서는 우리의 소리를 고백을 새노래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현실을 오늘 본문 처럼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될 때 그러한 영적인 현실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우리는 다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까지, 지금부터 영원토록 새노래를 부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시온산 위 어느 곳에서 우리 산성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함께 어린 양을 찬양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