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31:1-
본문은 욥이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하는 내용. 욥의 고난는 죄악으로 이해하는 친구들- 욥은 스스로의 무죄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죄를 피하였는지 다루고 있음.
성(처녀, 타인의 아내)
경제(남종/여종, 가난한자, 고아, 과부)
마음(재물 의지, 상대 저주)
적극적으로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 것도 죄지만, 욥은 소극적으로 위기에 처한 자들을 모른척한 것도 죄로 여기고 있음. 처녀의 경우- 재산이 많기 때문에 욥이 원하면 첩으로 둘 수 있었을 것임. 그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지만, 욥은 그것을 죄로 여기고 있음. 간음은 말할 것도 없음. 다른 사람의 것을 속여빼앗는 것도 죄로 여길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그냥지나치는 것도 죄로 여기고 있음. 심지어 마음으로도 다른 이를 저주하거나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음.
1. 죄는 하지 않은 것도 죄다
우리는 흔히 의로움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으로 매우 소극적으로 생각하지만 욥은 의로움을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음. 단순히 남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은 것도 죄로 여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까지도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음.
모든 사람은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이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함.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누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욥의 기준만으로도 우리는 과연 통과할 수 있겠는가 쉽지 않음.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2. 죄는 관계의 타락이다
죄에 대해서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문제로만 여기기 쉬움. 그러나 그것은 죄의 한 부분일뿐. 죄는 관계의 타락을 가리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이웃과의 관계가 변질될 때 죄가 됨.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지내야할 관계들이 무시하고, 착취하게 될 때 죄가 되어버림. 이런 관계의 타락은 결국 자기 자신도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과 관계도 깨어버리게 됨.
이 시간 우리가 기도할 때, 혹시 우리가 마땅히 해야함에도 하지 않아 죄를 지은 것이 있는지
다른 사람과 깨어진 관계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회복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욥33장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이어서 엘리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은 평행선을 유지하였습니다. 무죄를 호소하는 욥과 욥의 유죄를 주장하는 친구들 사이에 접점이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욥은 조금씩 중재자의 존재,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서 호소를 들어줄 중재자를 찾아가고 있었지만 논쟁 자체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에 비해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32장에서 37장까지 엘리후의 연설이 등장하는데, 이는 앞에 논쟁에 끼어들기에는 엘리후가 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리후는 그 이름이 그가 나의 하나님이다란 뜻으로 욥기에서 유일하게 히브리식 이름을 지녔습니다. 나중에 엘리후의 연설후 하나님께서 등장해서 정리를 할 때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는 책망하시지만 엘리후는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기 전에 엘리후의 연설을 통해서 미리 예비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엘리후가 주장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욥이 죄인이라 벌받는다는 친구들의 주장과 욥은 자신이 벌을 받고 있지만 무죄라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엘리후는 욥의 주장이 자칫하면 하나님은 불의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거나, 악을 신경쓰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보기에는 세상은 현실적인 힘으로 움직이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을 해도 현실적으로는 없는 것처럼 여기는 자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힘있는 자들에게 도덕이나 윤리는 겉치레일뿐이지고, 약자들에게만 강요하는 덕목인 경우가 많습니다. 강자들에게는 법이 거미줄이나, 약자들에게는 동앗줄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은 정의를 실현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지 못하고, 무죄한 자의 고난을 본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행하시는 분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신앙인은 초점을 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친구들과 욥은 끊임없이 욥에게 초점을 맞추었지만, 엘리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욥에게 초점을 맞추었을때는 전혀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 그 실마리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고난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늪과 같은 우울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할 때 벗어날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해결될 때 그 문제의 답을 찾아서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관점이 바뀌게 되면서 문제의 정의가 바뀌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문제였지만, 지금은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전환은 어디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우리의 문제를 놓고, 우리의 고난을 놓고 기도할 수 있겠지만 먼저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코 앞의 어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를 개닫게 하여 주실 것을 놓고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욥4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