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이1:1 요삼1:1
요한2서, 요한3서
도입
요한 이서와 삼서는 요한일서의 내용을 보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서에서는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와 사랑에 대한 강조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이단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받아들이는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당시 헬라인들의 생각으로는 영이 육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육체는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도 어리석게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제발로 감옥에 들어오는 것과 같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고통받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무척 영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요한 삼서는 흔히 2절에 나오는 인사가 유명합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다고 나와 있는데, 이는 당시 흔한 인사 말이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의미를 담아서 중요하게 여기기 보다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앞서 다루었던 영지주의나 거짓 교사에 대한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요한삼서는 초대교회 내에 순회 전도자들을 맞이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집도 없이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신 것처럼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역 교회는 그들을 맞이하고 숙식을 제공해야했습니다.
손님을 환대하는 풍습은 초대 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박해 받는 그리스도 인들을 환대하고, 서로 돕는 모습이 없었다면 복음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말라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맞이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편함을 감수해야할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 내에서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권을 행사하기 위해, 전도자들을 맞이하지 않은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몇 명 모였다고 한들, 당국에 인정받는 모임이 아닌데도 그 안에서 벌써 누가 힘을 가지는지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거룩한 공동체로, 성도들의 공동체로 부르지만 우리의 현실은 아직 죄인들의 소굴로 남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우리가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환대를 베풀어 주신 주님처럼, 우리를 맞아 주신 주님처럼 우리 또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람들을 환대하며 축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