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9 금요직장인예배(막14:22-24) 수도원이 사라진 이유

제공

수도원이 사라진 이유

본문: 막14:22-24 // 찬송가: 228장

카톨릭은 수도원이 있는데, 개신교는 수도원이 없습니다. 물론 개신교 수도원이 있지만, 거의 없습니다. 중세에 그 많던 수도원들은 종교개혁을 하면서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전통은 수도원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요? 그 힌트는 오늘 부른 찬양과 본문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양과 본문의 말씀은 모두 성찬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성찬은 종교개혁 당시에 핵심적인 주제였습니다. 바로 이 말씀,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나는가에 따라 교회가 나뉘어졌습니다.

당시 카톨릭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찬하기 전에는 일반적인 떡과 포도주이지만, 기도를 하고 나면 이것이 주님의 몸과 피로 실체가 변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미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이것은 상징일 뿐, 포도주와 떡은 그대로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중세 카톨릭의 관점은 떡과 주님의 몸이 나뉘어 지듯이,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 시장과 수도원,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일을 하는 평신도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제가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일에 하는 일만 거룩한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나머지 날들에 하는 일들은 세속적인 일, 먹고 사는 일일뿐이었습니다.

한편 주님의 몸이란 표현이 단순히 상징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물질만, 세속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사실 교회에서 하는 일이나, 세상에서 하는 일이나 다 사람이 하는 일, 그렇고 그런 일일 뿐 은혜, 임재란 표현은 단지 말 잔치로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 눈 앞에 보이는 일이고 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세상을 바라볼 때 중세 카톨릭처럼 바라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따로 있고, 세상적인 일은 따로 있어서 주일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직장에서는 내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경적인 논리에 따르지만, 직장에서는 직장의 논리 자본의 논리, 경영의 논리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혹시 중세 지식인들처럼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처럼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 해석하여, 교회가는 것도 다 마음에 안정 얻으려고 가는 것 아냐? 믿음이 있으면 그래도 마음이 편해지니, 교회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나름대로 타당하게 보이지만,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사실 인생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장에서 일이 하나님과 상관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게 되면 주의 일 하겠다고 신학교 가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 주님과 상관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내 평생을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만 하는 것처럼 슬픈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 그중에서 특히 루터는 이러한 관점을 거부했습니다. 성찬을 하면서 은혜를 체험했던 그는 단순히 상징이란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변한다는 관점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성찬을 할 때, 이 포도주와 떡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한다고, 그래서 우리가 떡만 먹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살을 함께 먹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세속적인 일과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일이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평신도와 사제가 나뉘어 질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평생하는 이 일, 어쩌면 구질 구질하고 힘들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수도원은 왜 없어졌을까요? 수도사였던 루터는 수도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일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수도원을 빠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루터 본인도 수녀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들을 키우면서 종교개혁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개혁에 동참한 루터의 후예들은 세상과 분리된 수도원을 만들기보다 세상을 수도원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수도원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거룩한 일로 여기고자 하였습니다. 만인 사제설도, 소명설도 다 우리가 하는 일이 주님께 드려질 일이란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이러한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의 삶이 주님께서 받으실 거룩한 삶이 되길 원합니다. 직장에서 감당하는 그 모든 일이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받으시는 거룩한 일이 되길 소망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제자들처럼, 평범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았던 루터처럼, 이제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수도사처럼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