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04 [주일예배] 더욱 큰 은사

고전13:1-13

도입
군 입대 날짜가 정해진 순간부터 청년들은 고민을 시작합니다. 무엇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남은 날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을 합니다. 앞으로 군대가면 못 먹을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점점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다급해 집니다. 입대가 얼마 안 남으면 매끼니 마다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납니다. 입대가 일주일 남았는데, 영어공부를 시작하거나 자기계발을 하는 사람을 못봤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을수록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시간이 많을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제한되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것을 선택합니다. 군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세달 밖에 남지 않았다면 외국어를 시작하겠습니까? 다이어트를 하시겠습니까?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기도를 하시거나 예배를 드리시겠다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실 것입니다. 그 일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2016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달까지 4달이 남았지만, 12월이 되면 다음해 넘어갈 준비로 뒤숭숭합니다. 또 중간 중간 이리저리 바쁜 일들 다루고 나면 정작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 할까요?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올해가 끝나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제일이라는 사도바울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을 고치고, 헌신을 하고, 구제를 하고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겠지만 사도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아니 믿음보다도, 소망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합니다. 물론 믿음과 사랑이 따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믿음보다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할 수 있을까요? 흔히 우리를 믿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한다고 하지 사랑생활한다고는 안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보다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설명합니까?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여러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 은사를 사모하며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개척을 했지만 그 후에는 아볼로라는 사역자가 와서 목회를 했습니다. 아볼로도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내 분파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친했던 이들과 아볼로를 통해 신앙이 자란 이들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거기에 친 베드로파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파라고 이름을 붙이며 교회가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 갈라진 교회를 추스르고 은사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서는 교회내 여러 직분과 은사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은사를 주시는지 설명을 하고나서 12장 마지막에 사도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가 왔을 때 교회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읽어주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잘 들으세요 하고 읽어나갔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절에서, 12장의 마지막 절을 읽었을 때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방언이나 통역, 병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은사가 있다는데 기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1-3절: 각종 은사와 사랑의 관계
바울은 1절부터 3절까지 각종 은사를 다룹니다. 평범한 은사가 아니라 극단적인 사례, 어쩌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들어가며 설명을 합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을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남들이 모르는 영적인 지식을 갖추고, 전 재산을 다바쳐서 구제를 하고 심지어 내 몸을 내어 주는 것,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종교적인 열정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러한 은사와 헌신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러한 은사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그 칼을 쓰는 사람이 악한 마음을 품는다면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그 칼을 쓸 때 생명을 살리는 칼이 될 수 있습니다.

은사는 교회를 섬기는 연장입니다. 연장이 아무리 좋아도 그 연장으로 일을 안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연장이 없어도 다른 연장을 쓰면 상관없습니다. 신유의 은사가 없어도 병원가면 됩니다. 방언의 은사가 없어도 외국어를 배우면 됩니다. 요즘에는 교재도 잘 되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왠만한 외국어는 다 배울 수 있습니다. 신유의 은사만큼 중요한 것은 아픈 형제를 애통히 여기는 마음, 사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방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그 은사 다가져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사가 없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면 은사를 시기해서 이런 소리를 하나보다 하겠는데,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병 고치는 은사도 있었고, 삼층천까지 갔다오며 영적인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을 못했겠습니까? 학문에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4-7절: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 설명이 나와야 합니다. 4절부터 7절까지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설명을 합니다. 오래 참음, 온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등등 성도가 갖춰야 할 모든 태도를 다 사랑에다가 집어 넣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도바울이 첫 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든 들고 있는 것은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은 혼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하는 것처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은 굳이 부짖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자유인과 노예가,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지내려니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이를 용납하는 것, 그리고 견디고 기다려주고, 그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딱 갈라서면 됩니다. 그것을 뭐라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지금의 갈등을 참아야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견뎌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일 다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한 척하지만 정작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는 얼마나 더러운 자들이고, 얼마나 문제를 많이 일으키겠습니까? 그러나 오래 참으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수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견디셨지 않습니까? 하물며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우리들이 동일한 신앙을 가진 이들을, 가족을 상대로 참지 못한다면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한 은사가 없어도 신앙생활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8-12절: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사랑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덕목을 넘어서서 영원한 시간 속에서 필요한 덕목이 됩니다. 8절에서 12절까지는 영원 속에서 사랑을 설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 속에서는 다른 은사들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천국에 가서도 신유의 은사가 쓸모 있겠습니까?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겠습니까? 천국에 가서 방언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은사들은 다 말세가 오기 전까지만 쓸모 있는 것들입니다. 때가 이르면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요즘 주판 쓰시는 분 있습니까? 저도 어릴 때는 주산학원 열심히 다녔습니다. 주판이 흔해서 복도에서 스케이트처럼 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안가서 주산학원도 다 사라졌고, 교과서에서도 없어졌습니다. 상고에 가도 요즘은 주산을 안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주산학원에서 상받고, 주산 몇 급 딴 것이 지금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주산 1급이라 하더라도 컴퓨터에 못 당합니다. 컴퓨터를 쓰기 전까지는 주산 1급이 대단한 은사지만 시대가 바뀌자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다른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에 모든 은사는 그치가 될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도,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다시 사신 예수께서 다시 오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고, 이러한 소망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는가가는 현재의 일이 되지만 믿음이나 소망은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적용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더욱 더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젊은 사람들이 스펙을 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 아닙니까? 더 탁월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런 노력이 이 사회에서 버티기 위해서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것은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끝없이 네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 증명하라고 다그칩니다. 얼마짜리인지 증명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밤낮 뛰어 다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아무런 쓸모없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내어주신 주님, 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본받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방언을 못하고, 예언을 못해도, 신유의 은사가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은사가 신앙의 척도가 아닙니다. 용한 무당도 신통한 일을 합니다. 작두를 타고 과거를 맞추고 별 희안한 일을 다합니다. 그런 신통력이 하나님께 속한 증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 속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을 참고 견디지 못한다면, 서로 사랑하는데 한 걸음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실패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쉽게 흔들리는 결단과 헌신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금방 포기하게 되고, 화를 내게 됩니다. 심지어 가족이라도 사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한 번만 참으면 되는데, 그 한번을 못참아서 큰 소리를 내고 결국에는 내 화를 내는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니 화를 냅니다. 내 생각과 다르니 내 판단과 다르니 거슬리는 행동에 대해서 화를 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지 못합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희미하고 불확실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내 자식이라고 해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 안에 어떤 동기와 이유가 있는지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사랑의 관계를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상대는 상처를 받게 되었고, 그 관계는 이미 깨어 질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으며 지낼 수 있겠지만 속 깊은 곳에는 이미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틀리다고 생각해서 화를 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12절에 거울로 본다는 표현은 요즘처럼 좋은 거울이 아니라 옛날에 쓰던 울퉁불퉁한 거울을 뜻합니다. 희미하고 제대로 비치지도 않는 거울로 상대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판단과 내 상각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낸다면 참으로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참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상대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보게 하실 것을 믿으며 상대를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최고의 은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의 얼굴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예배당에 함께 예배드리는 것도 이번 주가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과연 내년에, 10년 후에도 같이 있을까요? 같이 있다하더라도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더욱 능력있는 사람이 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사회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보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사랑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천국에 가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내가 미워하는 아무개를 영원히 봐야 하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일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의 빈약한 결단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2장 마지막에 더 큰 은사를,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공동기도문으로 같이 기도할 때, 우리에게 사랑을 주실 것을 구합시다. 얼마남지 않은 2016년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의 본질인 사랑으로 채워갈 가길 기도합시다. 그렇게 최고의 은사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사랑
군대가기 전에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음.
사람을 만나는 것-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나라는 사람은 그 관계속에 있기 때문에…
10일 후면 군대가는데, 영어를 공부하겠습니까? 아니면 새로우

남녀간의 사랑

그리스도의 계명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6장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사랑과 다른 것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가?

사랑은 도구가 아님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
1.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2.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3.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이제 2016년도 4달 남았습니다. 년말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생각한다면, 이제 100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을 무엇을 채우시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 삶을 채워간다면 후회하지 않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표지는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씀과 성례전, 치리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

성육신의 사랑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그 사랑을 어떻게 구체화 하는가?

사랑이 아닌 것은?

사랑은 무엇인가?

3-7 더욱 유용해지기 위해
더욱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러나 사랑은

도입
입대를 앞둔 청년 – 무엇을 하는가?
얼마남지 않은 2016년
우리 인생에서 어떤 의미?

우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찾게 됩니다.

1년이란 시간이 주어 질 때 흔히
더 유능한 사람이 되고, 더 쓸모있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영어를 공부하고 운동을 한고, 기술을 닦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자기의 가치를 높이려고 노력합니다. 더욱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궁극적인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업의 기준도 바뀝니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덕목도 늘 바뀝니다.
예전에 주산 많이 배웠지만,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음.
주산할 때 터는게 뭔지 모르는 학생들도 있음.

우리가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면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본문의 배경

고린도교회 – 은사가 많은 사람들, 그러나 교회가 갈라져 있던 교회, 파가 나뉘어 있음. 바울파, 아볼로파, 이도저도 아닌 파

많은 은사에 관심을 가짐.

1. 사랑은 다른 은사를 능가한다.
다른 은사- 교회를 섬기기 위한 수단,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 사랑이 없으면….

2.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말씀. 나와 다른 사람들을 견디는 일, 그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하는 법…
사랑임…

3. 사랑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한다.

  • 믿음, 소망도 궁극적인 가치가 아님
  • 사랑이 가장 최고의 가치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각자가 찾아가야함. 오늘 고린도전서가 근거가 되고, 자기를 내어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함.

어린 교회

종교개혁 당시 무엇이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가?
바른 말씀이 선포되는 곳, 성찬이 거행되는 곳 여러 가지 정의들이 있었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가?
서로 사랑임

요일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도입

입대를 앞둔 청년

제한된 시간은 소중한 것을 드러낸다

얼마 남지 않은 2016년

본문의 배경
파벌로 갈라져 있는 갈등 중인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의 은사

사도 바울도 가장 중요한 은사를 설명함.

사랑

사랑은 가장 필수적인 은사-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임

교회의 표지-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