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6월에 초교파 문서선교기관으로 조선성교서회 (지금의 대한기독교서회가 설립되고 첫 작품으로 낸 것이 “성교촬리”라는 제목이 불은 9장짜리 소책자와 한 장 짜리 달력이었다.〈성교촬리〉는기독교의 근본교리를 간략하게 설명한 전도책자로 기독교인이 지킬 덕목에 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이 책과 함께 달력을 인쇄한 것은 교인들에게 ‘주일’이 언제인지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때까지는 ‘주간’ 개념도 없었고 따라서 주일 휴무 개념도 없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서양력에 따른 주간과 ‘안식일’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성교촬리〉에 규정된 안식일 규정이다.
“예수를 밋는 자는 맛당이 안식일을 직힐거시니 례배당에 잇셔 도를 듯고 마움율 기르고상데룰 찬송하고 집에 잇셔도또한 세상일과 다른 공부를 긋치고 집 사람과 한가지로 성경을 고 기도하며 찬미하나
초기 한글 성경에서는 히브리 음가를 그대로 따서 안식일을 ‘사밧날‘이라고도 번역했다. 히브리어로 ‘사밧’은 “중지!”,“멈춤!”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항상 하던 일도 아니하며 회륨하고 노는 일도 아니하고 례배당에 가서 도리도 둘으며 또 성경을 보고 기도하며 노 래틀 불러 하나님을 찬미하며 좋은 말을 하며 이날은 더욱 착한 행실을 하는 날”《원입교인규도》,1895.로서 기독교인이 지켜야할 규례 중에서도 기본 규례였다. 그 결과 교인들은 세상에서 7일마다 하루씩 “일 안 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선교 초기 개성에 김보경이란 교인이 있었다. 짚으로 미투리(짚신)를 삼아 장에 내다 팔던 영세 상인이었다. 어느 핸가 음력 섣달 그믐이 되어 개성에 큰 장이섰다. 정월 대목을 보려는 상인들이 붐볐다. 김보경도 대목에 맞추어 미투리를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장날이 되고 보니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다.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이번 장에 내다 팔지못하면 정월 명절이 지난 보롬후에야 장이 설 터인데…… 하필이면 안식일과 겹칠게 뭐람 ”
밤새 고민하다가 “교인이면 안식일을 범해선 안 됩네다”하던 선교사의 말이 생각나 장사를 포기하고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름날, 장날은 아니지만 장날 뒤끝이라 몇 컬레라도 팔아볼 요량으로 미투리를 갖고 시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장이 텅 비어 있었다. 장꾼도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서 두리번 거리다 시장 한 귀퉁이에 짐을 풀어놓았다. 그리고도 한참 동안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순사들이 와서 위에서 높은 사람이 지나간다며 상점 문을 닫게 하고 시장 사람들을 호통 치며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 고 텅빈 시장 바닥에 김보경 혼자 짐을 풀어놓고 기다린 것이다. 상점 안에 갑혀 있던 상인들은 그가 순사에게 끌려 갈 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온다던 관리는 나타나지 않고 한참 후에 순사가나오더니 호각을 불고 ‘경보해제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여기저기 숨어 있던 사람들이 시장으로 몰려나와 순식간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미투리를 파는 사람은 김보경뿐이었다. 그보다 먼저 나왔던 장사꾼들은 경보 시간이 길어지자 장사를 포기하고 들어갔던 때문이다. 결국 “안식 후 첫날”,김보경은 갖고 나갔던 미투리를 모두 팔았다. 그것도 시세의 곱절로 쳐서. – 장병욱. «한국 교회 유사>. 성광문화사.
김보경은 이런 체험을 교회 집회에서 간증하였고, 그후에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며 근면하게 일해 큰 부자가 되었다. 주일이면 개성의 동서남북 네 곳에 있는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 화음에 맞추어교회로 가는 교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교인들이 물건을 사지 않으니 믿지 않는 상인들도 주일이면 가게 문을 닫았다. 개성의안식일은 조용하고 거룩한 날로 바뀌었다.
개성뿐 아니었다. 교회가들어간 곳에서는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졌다. 이처럼 교인들의 안식입이 점차 일반인들의 ‘휴일’로연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종은 갑오개혁,을 단행하고 나서 1895년 1 월 1 일부로 ’일요휴무‘를 공포하였다. 이때부터 주일은 ’공휴일’이 되었다. 이로써 교인이든 아니든 주일이‘안식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일성수 – 이것은 한국 교인들의 자랑스럽고 대표적인 신앙 전통이 되었다. 교인들은 주일 전날에 몸을 씻었고 주일이면 정성스럽게 헌 금율 준비하여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예배당으로 향하였다. 주일에 노동 온 물론 물건을 사고파는 것조차도 금지되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에 버금가는 엄격한 습관이 되었다. 그러했기에 일제 말기와 해방 직후 공산세력의 강요에 교인들은 순교의 각오로 저항하였던 것이다.
출처: 이덕주,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 신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