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도입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일제 강점기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친일파를 비롯해서 나라를 잃은 수치스러운 시기였지만 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던 시기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나 안창호 선생과 같은 인물들이 민족의 위기 상황 속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 민족의 위기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에 보석과 같은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아니 위기 상황이 되어서야 보석과 같은 사람들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유다의 마지막도 그렇습니다. 바벨론이 중동을 비롯하여 당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유다가 피할 길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성경의 선지서들이 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뜻에 둔감하던 민족이 위기 상황 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
에스겔 선지자도 유다 망국기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었습니다. 에스겔은 특이하게도 포로 생활 중에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한 자였습니다. 유다가 완전히 망하기 전에 나라의 중요 인물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쿠데타를 일으키면 국가 운영에 관련된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바벨론은 유다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국정 운영에 관련된 자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유다의 힘을 꺽는 수단인 동시에 인질로 삼는 방책이었습니다.

에스겔은 그 때 포로로 끌려간 자였습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했는지 모르지만 예레미야는 제사장으로 섬기기 전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제사장으로 섬기기 위해 준비했는데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제 30살이 되어 정식으로 제사장으로 섬길 나이였지만 그가 섬길 성전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언제 제사장으로 직분을 감당할지 기다리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포로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에스겔 서의 말씀입니다.

시대 상황
에스겔은 예루살렘 멸망 전에 소명을 받습니다. 그 당시 포로로 잡혀간 자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언제 우리가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생각을 하고 살지 않겠습니까?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 삶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소식을 주고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로들은 돌아갈 생각에 그곳에 정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속초에 아바이 마을이 있지 않습니까? 아바이 마을가면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곧 통일되고 고향에 갈 생각을 살았습니다. 판잣집에 살아도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이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집을 짓고 정착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가족을 버린 놈으로 취급하기 일수였습니다. 에스겔과 함께 했던 포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돌아갈 날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국땅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고국의 소식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해외 나간 교포들이 매일 한국 뉴스에 귀기울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던 포로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구성
에스겔서의 구성을 살펴보면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부는 1장에서 24장까지로 하나님의 영광 및 에스겔의 소명을 비롯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습니다.

2부는 25장에서 32장까지로 이방 나라들과 통치자들에 대한 신탁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선지서들도 늘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는데, 에스겔서도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습니다.

3부는 33장에서 48장으로 장래 회복될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으로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기대를 하던 포로들에게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심판에 대해서 예언하였지만,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는 앞으로 회복될 이스라엘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주류와 반대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민족주의 감정에 사로잡혀서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망할 것을 예언해야 했고, 모든 사람들이 낙심해서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길 것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반대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약간의 희망에 대해서는 절망을 선고하지만, 절망한 자들에 대해서는 희망을 선포하였던 선지자입니다.

특징
에스겔 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첫 번째로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환상속에서 여러개의 바퀴가 여러 영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성전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성전을 떠났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곳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그 성전을 사랑하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건물에 붙잡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하늘과 땅이며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 이후로 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려한 예배의식과 제물로 하나님을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분입니다. 건물을 넘어서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떠난 것은 비극이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날 수 있다면, 그렇게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포로로 잡혀있는 이 땅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수 있는 곳이 됩니다. 그 어느 곳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건축과 관련하여
소중한 신앙이지만, 이 성전을 신성화하는 순간 우상이 되어 버림. 우리는 항상 신성화를 경계해야함. 특정한 지역을, 특정한 건물을, 특정한 인물을 신성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비 신성화시킨다.

예전 사람들이 해와 달을 섬기고, 각종 자연물을 섬겼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들의 신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왕들이 자신을 신이라고 하였지만, 성경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며 왕이 특별히 신성하다는 소리에 김을 빼버린다. 모든 것을 다 세속적으로 만들어 버림. 그 속에서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만듬.

이 시대에는 돈이 신성화되는 시대, 돈의 신성을 박탈해야함.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조상들의 죄로 망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상의 죄가 후손들에게 미칠까요?

예전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라는 책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부모 세대의 죄가 자녀 세대에 흘러간다는 주장입니다. 이 말이 맞을까요 틀릴까요? 이 책을 썼던 이윤호 목사는 자기 책이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신문에다 사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니 모세의 율법에도 부모의 죄로 자녀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죄의 공범자들에게만 죄를 함께 물었습니다.

에스겔 서에는 부모의 죄가 아니라 자기 죄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의인이라도 자기 자식을 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각자의 책임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상들의 관습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각 세대 각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남의 죄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심판은 지금 세대의 죄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개인의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중보하지 않습니까? 에스겔 서에도 이 땅을 위하여 중보할 자를 찾지 못해 한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스겔22: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에스겔22:31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중보할자, 하나님 앞에서 이 땅을 놓고 중보할 자를 찾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중보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중보자를 예비하시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케 하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분노를 가로 막고 멸하지 못하게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러한 중보의 역할을 하지 못하시기에 스스로 중보자를 예비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에스겔 서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회복된 조국을 그릴 때 단순히 남쪽 유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몇백년전에 멸망하고 이미 흩어져 버린 북이스라엘까지 함께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미 혼혈민족이 되어버리고 그 땅에는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에스겔의 비전에는 민족의 회복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마른뼈가 살아나듯이 그들 민족이 살아날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민족이 회복되고, 성전이 회복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북한을 포기할 수 없음.
우리 민족의 미래를 바라볼 때 함께 가야함.

정리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그 사랑을 감사하며 나아갑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한해를
사랑으로 채워가게 하소서
참고 견디며 용납하며 허물을 덮어주며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