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로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이 있다.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을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임진왜란을 맞아 왜군과 싸우다 전쟁터에서 죽었다. 이 집안의 애국 정신은 그 직계후손들과 정신적인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학통을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홍락은 항일 동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학봉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무려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학봉 가문이 항일 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1896년 100여명의 의병이 일본군에 패전하여 학봉 종택에 숨어 들었다. 의병 대장은 종손 김흥락의 사촌 김회락이었다. 이에 화가난 왜경은 당시 존경받던 어른이던 김흥락과 집안 어른들을 꿇어 앉히고 분탕질을 하고, 김회락을 총살했다.
안동 일대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김흥락이 왜경에게 포박을 당했던 이 사건은 안동의 유림과 학봉 집안을 포함한 의성 김씨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게 된다. 이에 수많은 제자들이 독립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제자 중 훈장을 받은 사람이 60명이니 훈장을 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이 항일 동립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다.
김흥락의 손자로 당시 김흥락이 포박당한 것을 지켜본 김용환은 당시 10세였다. 그러나 김용환은 조상들과 달리 노름꾼과 술꾼이었다. 안동 일대 노름판에는 꼭 끼었다. 종손이 종가의 재산을 다 날려 먹었다. 심지어 종가를 세 번이나 팔았으나 문중에서 돈을 걷어 다시 집을 찾아왔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뿐인 외동딸 장롱 살돈마저 써버려 어머니가 쓰던 헌농으로 외동딸 시집을 보냈다. 조선의 삼대 파락호(흥선대원군, 형평사 김남수, 학봉 종손 김용환)로 이름이 손꼽힐 정도였다. 김용환은 1946년 숨을 거두었으나, 그 이후 새로운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 날린 줄 알았던 재산이 실은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다. (현 시가 180억원)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철저하게 비밀로 밝혀 임종때에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조용헌, 명문가 이야기, 서울:푸른역사, 2002년, 341쪽-352쪽 수정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