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사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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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사귐
본문: 요일1:1-4

도입
“우리 아이는 원래 착한데, 나쁜 친구들을 만나서 그래요.”
아이가 문제를 일으킬 때 부모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원래 착한 아이인데, 나쁜 친구에게 물이 들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아이는 착한데 친구들이 나빠서 그런 걸까요? 대체로 비슷한 녀석들끼리 만납니다. 아들 친구의 부모들에게는 내 자식이 그 나쁜 친구일 것입니다. 그렇게 어울려 다니면서 서로 나쁜 영향을 주고 받은 것입니다. 좋은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과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격은 그 사람이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평가하기 어려울 때, 그 사람과 관계맺는 사람들을 살펴보거나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모아보면 거의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 그 사람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계정을 살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친구들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견적이 나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이런 원리가 적용됩니다. 어떤 논문이나 어떤 자료가 더 중요한지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때는 그 자료가 인용되는 자료를 바탕으로 판단을 합니다. 아무래도 좋은 자료에 인용되는 자료는 좋은 자료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환
이런 방식은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지금 건강한지, 우리가 제대로 믿고 있는지 살펴보고 싶을때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며 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쉬운 방법은 우리를 둘러싼 이들,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지금 내 신앙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 성도의 사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인사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왜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 3절에 아버지와 아들 예수와 함께 더불어 누리며 4절에는 기쁨이 충만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는 이들의 사귐이 그렇지 못하기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편지를 보낼 당시에는 이단들이 판을 쳤습니다. 복음이 로마 전역에 퍼지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였습니다. 같은 복음이라도 유대인이 이해하는 방식과 로마인이 이해하는 방식과 헬라인이 이해하는 방식이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갖고 있던 헬라 철학을 바탕으로 복음을 이해하기도 하고, 이방신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졌다고 하지만,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단들이었습니다.

교회 내에 이단이 늘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임 안에서도 서로 이단인지 의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 안에서 형제 자매로 여기던 사람이 이단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신천지 한 두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의심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가운데 요한 사도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로 사귐을 위해 이 편지를 쓴다고 3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귐은 무엇입니까? 우리 말의 사귐이란 말은 남녀간의 연애로 이해하기 쉽지만, 요한 사도는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로 코이노니아, 성도의 교제를 가리킵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여러가지 뜻으로 번역이 됩니다. 교제, 친교, 합동 이런 말로도 번역할 수 있고 선물, 기부금, 참여, 나눔 등으로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관계에서 오가는 풍성함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사귐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귐은 먼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시며 교제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1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태초부터 계신 분이시며,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그 사귐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과 교제했던 사람들은 그분의 음성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환상이 아니라 너무나도 분명한 실체로 그들 가운데 거하며 사귀던 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이 제자들에게로 이어졌듯이, 이제 제자들은 이방인이었던 이들,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과 사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원래의 사귐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사귐이었지만 이제 제자들이 더하게 되었고, 이제 수많은 성도들이 그 사귐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믿는 자들 사이의 사귐, 교제가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단: 가현설
그 당시에 강력했던 이단들은 주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귀신처럼 영으로만 있다가 가신 것이다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진짜 몸이 아니라 가짜 몸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서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가짜로 나타난 척했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이 가짜 몸으로 나타난 척 했었다면, 제자들과 갈릴리를 거닐며 보내던 그 모든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사귐이 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간접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아도, 직접 얼굴과 얼굴을 함께 하지 못한다면 그 만남은 피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깊이 사귀기 위해서 친히 이 땅에 오셨던 분이십니다. 그 사귐을 위해서 고통까지 감수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풍성한 사귐, 생명의 사귐에 더 많은 이들을 초대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가짜로 나타난 척했었다는데, 무슨 깊은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단들은 성도들 사이도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드는데, 무슨 사귐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사귐의 단지 혼자 도를 닦아 터득하는 종교로

이런 이단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사도 요한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과 여러 사도들이 이들에 대해 경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식에는 들어맞을지 모르지만, 복음에 반대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있는 척 하신 것이 아니라, 고통받으신 척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함께 하셨고, 참으로 고통받으셨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셨던 척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를 걸었던 이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랑의 교제를 나눴던 이들에게는 이런 이단이야 말로 견딜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부인하는 자들이 교회 내에 이단이 있고, 이단의 주장이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서 이를 분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경고하는 편지가 바로 오늘의 편지입니다. 이단을 분별하기 위해 서로 의심할 수 있지만, 그럴 수록 더욱 사랑하며 기쁨의 사귐, 생명의 사귐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요한서신의 주된 내용입니다.

] 쓴 편지의 인사말 부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편지를 쓴 이유를 밝히면서 바로 사귐이 있게 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쓴 배경을 살펴보면

그리고 기쁨을 위해 쓴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사귐, 성도의 교제를 위해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장작 하나만 따로 떼어 놓으면 금방꺼져버림. 그러나 잘타고 있는 장작더미속에서는 같이 타게 됨.

우리의 신앙은
0. 우리의 신앙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
0. 그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할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0. 사귐은 기쁨을 충만하게 한다. 우리 신앙생활은 사후의 천국을 위해 현세의 지옥을 견디는 것이 아니다. 먼 미래에 있는 천국을 현재로 끌어 오는 것이며, 그것은 성도의 교제로 이루어 지는 것임

그러므로 (당부)
⁃ 성도들과 교제를 늘려가십시오. 주일에 예배만 드리고 일찍 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차라도 한잔 가시고, 대화도 나누시고, 여전도회 모임도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의 모임에 주님께서 주인이 되시도록 노력합시다. 영락교회와서 놀랐던 점은 보통 계모임이 될 수 있는데, 그 모임이 선교모임이 됨. 같이 임원했던 분들끼리 마음맞는 분들끼리 놀러도 다니고, 재미나게 다닐 수있지만- 기도모임을 만들고, 후원을 함. 의미있는 모임으로 만들때 오래 갈 수 있음. 교회 밖에서 모일때도 신앙이야기를 자꾸 꺼내야함.
⁃ 생명의 사귐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봉생마중(蓬生麻中)
“쑥대가 삼밭에서 자라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 《순자(荀子)》 〈권학(勸學)〉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쑥은 원래 구불구불 자라는 식물입니다. 하지만 쑥을 삼밭에 심으면 곧게 자라는 삼의 영향을 받아 따라서 곧게 자란다는 말입니다. 한자로 봉생마중(蓬生麻中)이라고 합니다. 쑥 봉, 날 생, 삼 마, 가운데 중, 삼 가운데에서 자라는 쑥이라는 말입니다. 구불구불 자라는 쑥을 삼밭에 심으면 곧게 자라는 것처럼, 타고난 성품이 좋지 않아도 환경이 좋으면 성품을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길에서 만난 고전

성도의 교제
성도의 사귐

사귐이란 말은 코이노니아-교제, 친교, 합동 이런 말로도 번역함. 선물, 기부금, 참여, 나눔 등으로도 사용. 관계의 풍성함 속에 여러가지 의미가 포함되고 있음.

요한일서의 맥락- 가현설을 주장하는 이단들, 영지주의자들,
물질적인 쾌락을 주장하는 자들과 현실을 부정하며 사는자들
이들에 대한 철저한 배격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사랑을 강조함.

생명의 사귐

사귐이 없으면- 스스로 홀로 존재하는 존재
자기 속에 갇혀 있는 사람
사람들을 만나야 함.

사귐은 다른 이들의 고통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귐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넘어서는 사랑을 경험할 때 사귐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