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겨자씨만큼이나 작게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정기적인 기도로 헌신한 이 작은 사역을 하나님께서 이토록 크게 사용하실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력한 공산주의 체제를 붕괴시킨 평화 혁명이며, 성경적 방법이 낳은 기적이었다.”(한국의 독자들에게)
독일 통일 과정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의 ‘월요 평화기도회’다. ‘통독의 도화선’이라 평가된다. 1980년대 초부터 매주 월요일 이 교회에서 열린 평화기도회는 결국 동독 주민들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일깨웠다. 그 주인공 크리스티안 퓌러(1943~2014) 목사의 자서전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예영커뮤니케이션)가 번역·출간됐다.
책은 목회자 한 명이 역사의 물줄기를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1980년 가을, 종교개혁 이후 니콜라이교회 122대 목사로 부임한 퓌러 목사는 ‘우물 안 개구리’다. 목회에만 전념한 그는 베를린장벽 붕괴 소식도 축하 전화를 받고 알았고, 외국 여행은 독일 통일 후인 1990년에야 처음으로 갔다.
그렇지만 그가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 우물은 복음과 비폭력이었다. 평화기도회가 그랬다. 한때 참석자 6명만으로 기도회를 연 적도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민주화와 자유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면서 여러 단체가 합류했다. 정치적 주장도 쏟아졌다. 성경 말씀, 찬송, 기도도 없이 날카로운 정치 연설의 장이 된 것. 그는 이를 막았다. 물론 비밀경찰 슈타지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교회가 선동과 다툼의 장으로 예수의 발자취를 떠나고, 우리와 지역사회가 그리고 국가가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 하나 그가 늘 강조한 것은 ‘비폭력’이었다. 평화기도회 후 참가자들이 거리를 행진할 때에도 그는 교회를 지켰다. 그는 “두려움은 나를 밤낮으로 따라다녔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항상 두려움보다 조금 더 컸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마침내 이뤄진 통일. 그는 서독이 통독에 준 것으로 ▲헌법 ▲민주주의 ▲제대로 된 경제를 꼽았다. 반면 동독이 통독에 준 것으로는 ‘평화혁명’을 제시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든’ 동독 출신으로서 자존심의 표현이다.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20페니히와 명함’이다. 20페니히는 당시 동독의 공중전화 한 통화 비용. 그는 노숙인 등 누구에게나 20페니히와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언제든 전화 달라”고 했다. 실제로 정신병자까지 찾아왔지만 교회의 현관뿐 아니라 제단까지 ‘언제나 열려 있는’ 니콜라이교회는 그 모두를 품었다.
독일 통일 후 그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의 하나는 “평화기도회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나요”였다. 그의 대답은 “왜 평화기도회가 없어져야 합니까. 세계가 이전보다 더 평화롭게 되었나요”였다.
퓌러 목사는 별세하기 석 달 전 한국 독자들에게 남긴 글에서 “나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공적(公的)인 기도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하나 된 신뢰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평화적으로 극복되며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통일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출처: 김한수 기자, 조선일보, 2015년 11월 27일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27/20151127000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