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최인훈, 광장
거제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습니다. 북한과 남한 사이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중립국을 택합니다. 6.25 당시 전쟁 포로 중 중립국을 택한 사람은 76명이었습니다. 평안북도 룡천이 고향인 김명복씨는 1953년 포로 석방조치 때 풀려나 제3국 행을 택한 76명 중 한 명이다. 그는 현재 브라질에 살고 있다.
이들 76명은 북한의 억압적인 체제하에서 남한에서 포로로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처형될 것이 두렵고 종교적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좇아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또 피붙이 하나 없이 인민군으로 낙인 찍혀 살아야 하는 남한에 정착하는 것도 거부한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인도와 같은 중립국뿐이었다. 김씨는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인민군에 징집된 지 한 달 반 만에 국군에 투항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삶은 참혹했다.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전쟁터보다 더 살벌한 싸움이 벌어져 사망자까지 나왔다.
석방된 뒤 제3국을 택한 포로들은 먼저 인도로 보내졌다. 일부는 미국으로 가고 싶어했으나 정전 협정상 중립국만 택할 수 있었다. 조성훈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2001년 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은 2년간 인도에 남았다가 60명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10여명은 남한이나 북한으로 돌아갔다.
타국에서 이들은 의학교수, 채석장 주인, 어선 선주, 목사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 아르헨티나에서 자신을 ‘조센진’이라고 비하하는 일본인을 살해해 27년간 감옥과 정신감호소 등을 전전한 포로도 있었다.
김씨는 1956년 브라질에 정착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중 아무도 고향땅이 이토록 오랜 시간 ‘평화 협정’이 아닌 휴전 상태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채 분단돼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 출신 이민자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동포들은 이들을 단순히 북한 인민군 출신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
제3국 선택 포로 76명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귀향’을 제작 중인 조경덕 감독이 2009년 인터뷰했던 21명 중 10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조 감독에 따르면 남은 11명이 76명의 중립국행 포로 중 생존자 전부다. 조 감독은 김씨의 한국 방문에 동행하며 김씨는 한국에서 거제 수용소와 판문점을 방문할 예정이다.
출처: 연합뉴스, 2015년 5월 30일자, 최인훈 <광장>